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Feb 09. 2020

가면 속으로

가면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지하철의 일곱 좌석에 나란히 앉은 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한참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느 재난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된다. 출근길 환승역의 통로에는 얼굴의 절반을 가린 무리가 끊임없는 행렬을 이룬 채 마주 다가왔다. 일상은 바뀔 수 없고 가야 할 곳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얇은 가면 하나에 의지하여 삶의 전투를 치르러 출전하는 용사들이다. 감추어진 표정 만큼이나 비장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면 속으로


가면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 <오페라의 유령>

  거대한 샹들리에가 솟구쳐 오르 오르간 소리가 웅장한 화음을 발산한다. 괴기 선율과 함께 샹들리에의 불이 다시 피어오르고, 낡은 오페라 하우스는 그 옛날 찬란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거미줄이 하나둘씩 걷히고, 오랫동안 껴져 있던 무대의 횃불이 다시 타오르면, 오페라 「한니발」의 감미로운 선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다시금 북적이기 시작한다. 1919년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첫 장면이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 미궁에는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한 영혼이 있다. 천상의 목소리와 천재적인 건축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사람들을 피해 살아간다.  운둔과 회피의 삶, 그 삶의 중심에 가면이 있다. 해골 같은 하얀 마스크는 사람들이 그를 유령이라 믿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면 속에서, 그는 거칠 것이 없다. ‘유령’이 되어 오페라 하우스의 지배인들로부터 급여를 받아내고, 5번 박스 석을 할당받으며, 그가 작곡한 오페라를 무대 위에 상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그의 비밀스런 삶은 종결된다. 가면을 벗은 그는 더 이상 공포의 유령이 아닌,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저주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퇴장하고 다.


  『오페라의 유령』의 음울한 주인공 팬텀의 삶이 비참하면서도 신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정체를 감추어 준 ‘가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모양과 형태로 발달해 오며 오늘 날까지도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를 잡고 있는 가면은 역사와 문화 속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가?




가면의 기능과 역사


  일반적으로 가면은 얼굴에 착용하여 얼굴 전체 혹은 일부를 가리는 물체를 나타낸다. 변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면뿐만 아니라 투구와 방독면, 검도에서 쓰이는 방호면도 가면의 범주에 포함된다. 또한 입과 코를 덮는 위생용품인 마스크, 얼굴의 일부분을 가리는 안경, 가짜 수염 등도 일종의 가면에 해당한다. 얼굴에 쓰는 물리적 가면 외에도 심리적/내적 가면, 익명성으로 실제의 자신을 감추는 사회적 가면 또한 존재한다. 물리적 가면, 사회적 가면에는 모두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한자어인 가면(假面)은 ‘거짓 가’에 ‘얼굴 면’, 글자 그대로 ‘가짜 얼굴’이라는 의미가 된다. 영어의 마스크(mask)라는 단어는 라틴어 이전 토속어인 maskaro(연기나 그을음 따위가 맺혀서 된 검은 빛깔의 물질로 검게 칠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라틴어의 masca(마술사, 마귀), mascus(유령)로 이어졌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이 쓰던 가면은 persona라고 하는데, 이후 사람(person), 인격 또는 성격(personality)의 어원이 되었고, 카를 융에 의해 심리학 용어로 사용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반도의 조개껍데기가면(左)과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右)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면의 존재는 조개껍데기 가면이 대표. 기원전 8,000년경 시작된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그 용도와 기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원시 신앙, 특히 샤머니즘의 행위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가면은 주로 제의적,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면을 쓴 자는 무서운 힘의 화신이 되어 신적인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참가자들은 집단적 홀림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고대 이집트의 가면도 유사했다. 가면 쓴 자를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시키는 매개물의 역할을 하였는데, 신변의 안전과 죽음의 극복을 가능하게 했다. 파라오의 시신에 영원함과 완전함의 상징인 순금 가면을 씌워 불멸을 염원하였다. ‘파라오의 저주’로 잘 알려진 청년 왕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이 대표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에서 가면으로 신들의 등장을 구현하였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존재의 비밀과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운명을 마주하려 하였던 것이다.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연극에서는 비극적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영광의 순간과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스스로 눈을 찌르고 장님 거지가 된 순간의 가면이 다른데, 극중 주인공 운명의 극적인 변화를 가면의 교체로 표현한 것이다.


  고대인들이 가면을 사용한 까닭은 다음의 다섯 가지 정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장례용 가면, 곧 사자(死者)를 위한 것이었다. 사람의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악령(惡靈)으로부터 죽은 이를 보호하여 그들의 영혼을 편안히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대개 죽은 자의 얼굴 위에 가면을 덮어 두었는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중에 영혼이 자신의 육체를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이 장례용 가면의 대표적인 예.

  두 번째는 액막이용 가면으로 귀신과 같은 혐오의 대상을 위협하여 쫒기 위해 사용하였다. 무당, 주술사가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의식에서 착용했던 것이다. 주술사는 가면을 쓰는 순간 본래의 자신에서 벗어나 신들린 상태에 빠지게 되고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세 번째는 풍양의례(豊穰儀禮)용 가면이다. 가뭄 해갈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사용되는 가면으로, 가면을 착용하여 능력을 발휘하거나, 가면 그 자체가 제사 의식의 대상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네 번째는 호신 위협용 가면으로, 전투용 투구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데,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물론 악령이나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양면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보다 강한 자로 위장하여 적을 위협하는 역할도 하였는데,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얼굴을 한 기괴한 가면을 방패에 부착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은 성인식 및 비밀 결사를 위한 가면이다. 남성들이 성인으로 인정을 받는 의식에서 조상께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 때 쓰인 것이 조상신 가면이었다. 청년들은 성인식을 치름과 동시에 비밀 결사의 한 성원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 의식에서 선택된 엘리트는 가면의 조각사(彫刻師)로 또는 무도자(舞蹈者)로 육성되곤 하였다.


  중세에서는 가면의 착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가면을 쓰는 것이 십계명의 계율을 어기는 우상숭배, 즉 이교도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가면은 르네상스에 와서  되살아나게 되었으나, 고대의 신비적인 성격은 상실한 채 사교모임, 연극, 가장 무도회 등에서 귀족들의 유흥을 위한 형태로 애용되었다. 특히 카니발 가면은 익명성을 통해 시민과 귀족의 분별을 없애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면의 익명성으로 획득한 자유를 통해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조롱하였던 조선의 ‘탈’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역사 속 가면은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특히 종교적인 의미가 강다. 어떠한 초월적인 힘을 상징하여 작은 나를 감추고 보다 강한 존재를 통해 자신을 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오늘 날 실생활 가운데 가면의 신성성은 쇠약해졌으나, 유독 영화와 같은 문화 예술의 장르에서는 잔존하여 그 신비함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영웅에게 부여된 초월적인 힘의 근원


영화 속 마스크를 쓴 영웅들, 마스크, 배트맨, 스파이더맨, 조로(왼쪽부터)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마스크Mask」(1994)는 안면 근육 연기의 달인 짐 캐리를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던 영화다. 소심하고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인 은행원 스탠리 입키스 어느 날 우연히 고대의 유물인 <마스크>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통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다. 마스크를 쓰면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성격마저 변하는 주인공은, 이에 힘입어 은행을 털기도 하고, 조직 보스의 여자와 위험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며 일상생활로 돌아가서는 <마스크>를 쓰고 저지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스탠리는 <마스크>를 쓰고 저지른 여러 소동 탓에 경찰에 쫓기기도 하고 조직의 보스로부터 공격받아 <마스크>를 빼앗기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초월적인 능력의 가면을 되찾고 악한을 물리친다. 영화는 <마스크>의 무서운 위력을 깨달은 스탠리가 이를 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는 즉 고대의 가면이 지녔던 특징을 그대로 담아낸다. 가면 그 자체에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로 인해 빛과 같이 빠르게 움직이고 총탄을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신으로,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로 변모하는 스탠리의 모습은 가면을 쓰고 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부족을 통솔하던 샤먼의 모습 자체이다. 무엇보다 <마스크> 자체가 고대 유물이라는 장치로 등장한다.


  초월적인 능력의 가면은 악의 무리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영웅’들에게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마스크>처럼 가면이 직접적으로 능력을 부여해 주지는 않는 경우에도, 자신의 정체를 숨겨주는 가면의 존재는 영웅이 세상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매개가 된다. 고담시의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범죄가 발생할 때 박쥐 가면을 쓰고 배트맨이 된다.(또는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통해 정체를 감춘다.) 평범한 고등학생 피터 파커는 붉은 가면의 스파이더맨이 되며, 조로(Zorro)는 검은 안대로 자신의 신분을 지켜 낸다. 히어로물에서의 가면은 극의 흥미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소재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그들의 연인에게까지)로부터 정체를 숨기며 낮에는 시민으로 밤에는 영웅으로 위태롭게 유지해 나가는 이중생활은 극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오직 관객들에게만 영웅의 비밀을 알려 주 방식으로, 관객들 영웅 서로 공모하는 관계로 형성한다. 가면은 초인적인 존재들에게 최고의 은신처를 제공하기에, 영웅 가면을 애용한다.




공포와 악마의 상징


  『아마데우스(1985)』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독살설을 다룬 영화로, 제 57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 6개의 부문을 석권한 명작이다.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와 노력파 작곡가 살리에리의 경쟁을 담은 이 영화에도 중요한 대목에 가면이 흥미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누군가 모차르트를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과 아내 콘스탄체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연이어 실패하 음악적 슬럼프에 빠져 술로 마음을 달래며 폐인으로 지내는 중이다. 무심코 문을 연 모차르트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문 앞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 계셨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생전 아버지가 무도회에서 썼던 ‘가면’이 문 앞에 서 있다. 그 괴기한 가면을 쓴 이는 자신의 신분도, 곡의 대상도 밝히지 않은 채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죽은 이를 위한 진혼미사곡)의 작곡을 부탁한다. 꺼림칙한 요청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검은 가면을 쓴 이가 많은 액수의 돈을 제시하자 재정난에 빠져 있던 모차르트는 이를 허락한다. 알 수 없는 불안을 애써 감추며 모차르트는 혼신을 다해 진혼곡을 작곡한다. 그 사이 그의 몸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가져만 간다. 틈틈이 찾아와 작곡을 독촉하는 음산한 가면에게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결국 레퀴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의 진혼곡은 자신의 장례 미사에 쓰이게 된다. 검은 가면이 부탁한 것은 모차르트 본인을 위한 진혼곡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모든 것을 모차르트의 능력을 시기하여 그에게 복수를 결심한 동료 작곡가 살리에리의 계략으로 묘사한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의 계략은 적중한다. 평생 의지하였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던 모차르트였다, 진혼곡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이가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오자, 모차르트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여기서 가면은 곧 ‘아버지’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천재의 비극적인 생애를, 영화는 가면이 안긴 공포로 묘사한다.

  가면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영웅의 가면이 관객들에게만 그의 정체를 알려주어 관객이 영웅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가 된다면, 이와 반대가면 안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음 공포심을 유발다. 가면이 주는 공포감은 그것을 ‘악마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였을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뿔이 달린 붉은 가면을 쓴 형상으로, 악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록 오페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스 몰과 다스 베이더(왼쪽부터)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등장하는 다스 몰은 수심(獸心)을 인면(人面) 위에 덮어씌운 형상으로 공포심을 안겨 준다. 같은 시리즈의 다스 베이더(Darth Vader)경도 마찬가지다. 나치의 철모를 연상시키는 헬맷 아래로 짐승의 이빨 모양의 턱을 한 면갑을 씌워 기계적이면서도 야수 같은 이미지로 비인간성을 표출다. 다스 몰과 다스 베이더는 가슴 깊은 곳의 욕망을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내는 형상으로, 악마적 상징이 얼굴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과 공포를 배가시킨다.


  영화에는 가면 안의 존재에 대한 무지를 이용한 공포를 통해 악의 범용성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스타워즈』시리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가 제다이가 되기 위해 수련하던 중, 다스 베이더의 철가면 안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는 환상을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루크가 다스 베이더의 아들이라는 어떠한 암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스 베이더가 하나의 ‘전형’이며, 그러한 전형의 위험성은 선의 상징인 루크의 내면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치가 된다.


영화 <데블즈 애드버킷> 포스터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영화 『데블즈 애드버킷(1997)』에는 유혹당하는 파우스트인 젊은 변호사 캐빈과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인 밀튼이 등장한다. 결말 부분에서 캐빈은 밀튼의 유혹을 뿌리치고 당당히 승리한다. 다만 결말부의 충격적인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유혹을 이겨내고 웃음짓는 캐빈의 얼굴에 밀튼의 얼굴이 잠시 겹쳐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에서 한 번 이긴 것으로 완벽히 정복되지 않는 부정적인 욕망과의 끝없는 싸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고뇌하는 파우스트보다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에 더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는 시리즈의 상징이자 문화적 아이콘 자체다. 악마적 이미지의 가면은 인류 문화에 골고루 퍼져 있는 원형적 이미지에 해당된다. 이에 대매력을 느낌은, 인간 내면의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측면들이 가면의 형태로 외부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가면의 익명성, 그 양날의 검


  현대의 가면은 더 이상 주술적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가면을 쓴 자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면은 현대인들과 여전히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고대의 미신적 사회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가면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이를 필요로 한다. 이유가 무얼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프레스티지(2006)』에는 가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현대인의 가면에 대해 말한다. 로버트 앤지어(휴 잭맨)와 알프레드 보든(크리스찬 베일)은 마술에 열정이 많은 절친한 친구사이였으나, 수중 탈출 마술을 선보이던 도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앤지어의 아내가 죽게 된 이후 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사고 발생의 원인이 알프레드 보든의 고의적인 과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앤지어는 보든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보든이 총알 잡기 마술을 하는 곳에 찾아가 실탄으로 그를 쏘아 그의 두 손가락을 상하게 한다. 마술사에게 있어 손가락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의 치명적인 일. 둘은 최고의 마술사라는 명성을 두고 묘한 경쟁심을 갖게 되고, 누가 먼저 최고의 마술을 이룩할 것인지를 놓고, 서로 상대방의 마술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싸움을 시작한다.

영화 <프레스티지> 포스터

  그리고 그 싸움은 꽤 비겁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가짜 콧수염을 붙이고 상대방의 마술쇼 장소에 찾아가 훼방을 놓기도 하고, 마술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상대방의 조수를 납치하기도 한다. 콧수염을 붙이고 변장하는 것을 가리켜 가면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메시지 중 하나인, ‘삶 자체가 가면’인 현대인의 특성에 주목하여 보는 것이다.

  진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서로를 속인다. 서로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변장의 단계를 벗어나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기도 한다. 최고의 마술인 순간 이동 마술을 이룩하기 위해, 라이벌을 속이고 관객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 두 명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연기한다. 성공을 위해 ‘나’를 죽인다.(이는 비유가 아니라 영화 속의 실제 행위이다.) 그러자 삶이 가면 자체가 되어버린다. 아내에게, 자식에게까지 모두 거짓의 환영을 믿게 만든다. 가면이 가진 익명성과 비밀의 공간이 현대인에게 무궁한 죄악과 거짓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가면과 진짜 얼굴 사이의 빈틈을 채워 나가는 것은 욕망이다.


  그러나 가면의 익명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익명성의 위험한 공간은 동시에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6)』에는 또 하나의 가면을 쓴 영웅이 등장한다. 단 한 차례도 가면을 벗은 형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브이(V)는, 그러나 앞서 설명한 영웅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영웅이다.


  브이는 극심한 통제와 억압이 이루어지는 정부로부터 투쟁하는 혁명론자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활동을 한다. 실존 인물 가이 포크스(Guy Fawkes)는 영국왕 제임스 1세를 암살하기 위해 국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사람이다.(역사적 인물로서의 가이 포크스는 테러 단체를 이끈 극우 파시스트로, 오히려 국왕의 종교적 관용에 반발하여 영국을 카톨릭 국가로 삼으려 하였던 존재이다. 이러한 그가 자유와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꽤나 아이러니한 일.) 1605년 발생한 암살 기도를 ‘화약 음모 사건’이라고 하는데, 영국인들은 매년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 데이로 지정하고 가이의 인형을 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 거리에 끌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불태우는 행사를 치른다. 영국인들에게 구체제의 신봉자였던 가이 포크스는 결코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다. 브이가 그의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것은 명백한 조롱의 의미다. 구체제의 신봉자였던 가이 포크스마저 용납하지 못할 만큼 보수적인 정부와 통제된 사회에 대한 비난이자 역설적 조롱인 것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右)과 영화의 주인공 V(右)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가다가 필요한 때에 가면을 착용하고 영웅으로서의 힘을 발휘하는 형태의,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영웅에게 가면 착용 유무는 두 삶의 경계가 된다. 하지만 브이의 가면은 다르다. 브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단 한번도 가면 속에 감춰진 자신의 진짜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야 가면의 용도는 명확해진다. 환한 웃음의 가이 포크스 가면이 다수에게 익명성을 확보하며 거대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다수를 통해 정부에 대한 투쟁과 혁명은 비로소 완성된다. 가면을 쓰는 순간, 모두가 브이가, 영웅이, 투사가 되는 것이다. 가면은 성별, 나이, 외모, 학력, 힘의 강약의 차이와 차별을 가리고 모두를 평등하게 만든다. 르네상스 시기의 카니발에서는 가면이 있었기에 귀족과 시민간의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탈춤은 얼굴을 가림으로서 양반과 천인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가면이 확보해 주는 익명성이 정부의 억압으로부터 대중의 것을 되찾아오는 혁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면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가상 공간에서의 개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가면, 또 다른 나의 자화상


Masquerade! Paper faces on parade 각양각색 가면의 향연
Masquerade! Hide your face, 얼굴을 숨겨
so the world will never find you! 이 세상 사람들 널 알아볼 수 없게
Masquerade! Every face a different shade 저마다의 얼굴 다른 그늘들
Masquerade! Look around 둘러봐, 네 주위를
there's another mask behind you! 네 뒤에 또 다른 가면
Flash of mauve, Splash of puce 튀는 자주 누런 갈색
Fool and king, Ghoul and goose    광대와 왕 귀신과 거위
Green and black, Queen and priest 녹색과 검정 여왕과 성직자
Trace of rouge, Face of beas 붉은 루즈 야수의 얼굴
Faces, Take your turn, take a ride on the merry-go-round in an inhuman race
얼굴들, 차례가 오면, 다들 회전목마에 올라타 인간의 가면만 빼고
Eye of gold, True is false 금빛 눈 진실과 거짓
Who is who? Curl of lip 누가 누구? 꼬인 입술
Swirl of gown, Ace of hearts 날리는 가운 하트 에이스
Face of clown 어릿광대의 얼굴
Faces, Drink it in, drink it up, till you've drowned in the light, in the sound
얼굴들, 마시고 또 마셔 조명과 음악들 사이에서 익사할 때까지
But who can name the face 그런다고 누가 그 얼굴을 알까
Masquerade! Seething shadows, breathing lies 들끓는 인파 내뱉어지는 거짓말들
Masquerade! You can fool any friend who ever knew you! 당신이 아는 누구든 놀릴 수가 있다네
Masquerade! Leering satyrs, peering eyes 곁눈질과 탐욕의 눈길
Masquerade! Run and hide but a face will still pursue you!
도망치고 숨어봤자 가면의 눈길은 널 쫓지
                                        -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중, <Masquerade>


  가면에 대한 함의들을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는 노랫말이다. 가면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욕망의 분출물일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시로 변하는 외피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이 역시 나의 또다른 모습이다. 영웅을 보며 영웅의 가면을 써 보고 그와 일체한 정의의 투사가 된다. 공포와 저주를 느끼면서도 흉칙한 얼굴에 매료되는 것은 가면이 나를 닮았기 때문이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가면 무도회 장면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수많은 관계와 만남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매일 매일의 삶이 가면무도회의 향연이다. 속고 속여야 하는 인생을 부정하고 탓할 필요는 없다. 가면 또한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안소현, 「가면의 개념과 현상」, 박성복 편, 『가면과 욕망』, 서울:연극과 인간, 2005.

오주연, 「가면의 형식을 소재로 한 인간의 내면 세계 표현 연구」, 서울:홍익대학교대학원, 2000.

이영임, 「글로벌/로컬 문화상품 소비시대의 가면」, 박성복 편, 『가면과 욕망』, 서울:연극과 인간, 2005.

이영임, 「가면과 신화」, 박성복 편, 『가면과 욕망』, 서울:연극과 인간, 2005.

네이버 백과사전, 「가면의 발생과 기능」

매거진의 이전글 덕은 지식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