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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Feb 05. 2020

덕은 지식인가?

플라톤의 <메논>, 인성 교육은 가능할까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이 무엇입니까?


  제자 임제(臨濟)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스승 황벽(黃壁)은 다짜고짜 스무 대의 몽둥이찜질로 답했다. 사흘 동안을 내리 물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도합 육십 대. 제자는 뜻을 깨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스승의 곁을 떠나 다른 가르침을 찾았다. 억울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또 다른 고승(高僧)을 찾아가 하소연을 늘어놓는 찰나, 놀랍게도 제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스승의 곁으로 돌아와 그의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제자 임제는 자신의 깨우침에 대해 증명한다.

몽둥이를 든 스님, 선종의 고승 임제 선사

  불법을 깨달은 제자는 이후 선종(禪宗)의 한 종파를 창시하고 성승(聖僧)으로 명망을 얻는다. 임제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 몰려든 후배 스님들에게 우레와 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를 할(喝)이라 한다. 절대의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법, 할이란 깨친 자의 자리를 불가피하게 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불가함을 알면서도 불법의 진리라는 것을 굳이 언어로 옮겨보자면, 온 천하 만물이 불성(佛性)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곧 구도자의 마음에도 내재하여 있다. 따라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깨달음, 즉 돈오(頓悟)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가 이미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에게 지식(知識)은 잠시 망각한 것일 뿐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며, 회상(回想)의 과정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지혜자(智慧者)의 약간의 조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보았던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제후(諸侯)가 공자(孔子)에게 정치(政)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父父子子君君臣臣”, 즉 “아비는 아비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하는 것이 정치라고 답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사회의 구성원이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서의 도덕은 대단히 중요하며, 교육과 훈계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든 그것을 가르쳐 올바른 행동을 익히게끔 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기득권층에서 말하는 교육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정치에 대한 공자의 생각은 프로타고라스가 생각하는, 또 메논이 생각하는 덕()의 개념과 상통한다. 각자가 담당해야 할 몫이 다르기 때문에, 통치자의 덕과 자유인의 덕, 노예의 덕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보다는 이 덕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혹은 어떻게 강제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의 덕은 곧 ‘정치’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강제되는 형태의 덕, 곧 정치에 반대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통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렀다. 플라톤이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던 아니투스를 등장시켜 소크라테스와 논쟁하게 한 것은, 그 사형 판결의 본질에 대한 우회적인 고발이었다. 메논의 덕은 지식이 아니며, 따라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메논」의 소크라테스는 결론지었다. 또 다른 대화편에서 “덕은 곧 지식”이라고 정의했던 소크라테스의 결론과 상충되는 이 「메논」의 결론에는, 메논이 추구하는 강제적인 성격의 덕은 교육될 수 없을뿐더러, 결코 그들의 필요를 위해 교육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덕을 교육시켜 이를 효율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고자 하는, 메논으로 대표되는 당대 통치자들의 의지를 꺾기 위한 방책이자, 그들의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인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덕은 지식이며 가르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여기서의 가르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회상의 작업을 유도하는 것이지 정보에 대한 단순한 주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할이나 방(棒, 몽둥이찜질)과 같은 불가(佛家)의 방법들, 교육을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가로막는 칠정(七情)을 삼가 성인(聖人)의 대열에 이를 것을 주창하는 유가(儒家)의 가르침들은 수단은 각기 다르지만 덕에 대한 교육적 가능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선천적으로 가지는 인간 본성의 성성(聖性)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일깨우는 기술적인 방법의 개발을 통해 인간은 덕을 가르칠 수 있다. 앞서간 이들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회적 법규와 지식의 일방적인 내면화에 집중하는 오늘날 도덕 교과, 아니, 공민 교육 체계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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