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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Feb 01. 2020

포은에게 처세를 배우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정몽주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무려 645건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정몽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예종실록>, <경종수정실록>, <순종실록>/<순종실록 부록> 정도다. 재위 기간이 13개월밖에 되지 않던 예종, 병약하여 왕위에 머물러 있던 4년 중에도 세제(연잉군, 영조)의 대리청정을 허용해야 했던 경종(<경종실록>에는 세 차례 정몽주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을 제외하고, 조선의 역대 모든 왕의 기록에 정몽주의 이름은 마치 귀신처럼 붙어 대대로 전해졌다.


  반면 조선왕조의 개업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는 508건,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실록은 단종, 예종, 인종, 인조, 효종, 경종, 경종 수정, 정조, 순조, 헌종, 철종, 순종실록에 이른다. 빈도나 수치(數値)를 가지고 일반화하는 것에는 물론 무리가 따르나,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일견 억울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끝끝내 새 왕조의 개업을 반대하였던 몽주는 그가 반대했던 왕조로부터 사후에도 문충공(文忠公)이라, 충신의 반열로 대접을 받고, 조선의 창업에 불철주야 몰두했던 본인은 도리어 자신이 공들인 왕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니 말이다. 정도전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포은은 정말 올곧은 고려왕조의 충신이었을까?

영원한 라이벌이 되어 버린 친구들, 정몽주와 정도전


  드라마에서 보니까 그런 말을 하더라.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로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고. <처세술>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 같은데, 정몽주만큼 처세에 능했던 이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상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자수성가해야 했던 그에게 입신하는 것은 이루기 쉽지 않은, 그러나 꼭 해봄직한 일이 아니었을까. 단적인 예가 하나 있다. 1384년 정몽주는 동지공거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왕의 비 중 한 명인 의비의 동생 노구산이 중장(과거시험의 두 번째 단계)을 통과하지 못했다. 왕은 화를 내었고 이성림, 염흥방 등이 노구산의 아버지 노영수에게 가서 아들을 종장(과거 시험의 최종 단계)에 응시토록 하라 권했다. 아비가 자신의 아들만 특별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자 결국 불합격자 10여 명이 함께 시험 보게 되었고 노구산은 마침내 합격하게 되었다. 열전에는 최영의 비아냥거림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에 대한 정몽주의 어떠한 언행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동지공거로 과거의 부책임자 임무를 띤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사실상 묵인하고 넘어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몽주는 자신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던 집권자들을 포함한 고위 관료들과 만나는 모임을 스스로 주최하기도 했다. 1385년 최영을 비롯해 이인임, 윤환, 홍영통, 조민수, 이성림, 이색 등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해 기녀들을 데리고 주연을 베풀었는데, 우왕이 그 집까지 찾아가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신우」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의 행적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대목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것으로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다는 점이다. 포은은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새 나라의 주역들인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공신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우왕과 창왕의 신하로서 그들을 섬겼던 포은이 이제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왕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 죽이는 데 동참했다는 것은 과연 그가 진정한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정몽주가 고려라는 나라의 틀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성계 일파가 새 나라를 창시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지 않는 선에서의 협조였다는 정몽주에 대한 변호이다.)


  이성계 일파와 갈라선 이후,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포은은 이방원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성계의 조카사위기도 한 변중량이 이를 듣고 포은에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아무런 호위도 없이 병문안을 핑계로 호랑이굴에 들어갔다가 피살되었던 것은 정몽주에게 어느 정도 예견이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설마 암살이라는 비겁한 방법을 쓰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방원의 사람됨을 과소평가했던 것일까? 그 생각이 어떠했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법이다. 선죽교에 피를 쏟은 정몽주의 마지막 선택은 그간의 모든 행위를 덮고 후세에 길이 충신의 이름을 얻는, 죽음과 명예를 맞바꾼 최고의 처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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