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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Feb 01. 2020

남자, 울다

<고려사 이색 열전>을 읽고

이색의 초상화

  이색이 울었다. 억울해서 울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찌 된 영문인가. 하나는 왕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왕명 불복의 죄명으로 심문받던 도중, 울었다. 공민왕의 기사에서 왕이 격노한 예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나마 왕에게 총애받는 신하였던 이색도 험한 꼴을 면치 못했으니, 다혈질의 임금 앞에서 신하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공민왕 11년 8월, 왕이 친필로 총애하는 자에게 공주 창고의 쌀을 주라 명령하였다. 헌데 안렴사 이지태(李之泰)가 “왕의 명령은 반드시 양부(兩府)를 경유해서 내리는 것”이며 또한 “군량은 허투루 사람에게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들지 않았다. 왕이 그 죄를 물으려 하였으나 재상 유숙이 반대하였다. 왕이 말했다. “일을 모두 다 그대들의 뜻대로 하겠는가?” 쉽게 말하면, "니들 맘대로 해!"가 된다.(왕삐짐) 후일 유숙(柳淑)이 왕에게 사죄하고 왕이 그에게 황금을 주며 위로하는 등 일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으나, 비슷한 사건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다음 달인 9월, 불호사의 중에게 토지를 하사하려는 왕의 뜻을 이번에는 이색이 거스르고 나선다. 왕이 토지 명패에 옥새를 찍으라고 명하자 이색은 재상들과 의논해야지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며 뻗댔고 왕이 대노하자 두려워하여 그제야 도장을 찍었다. 왕은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색의 일이었던 감시(監試) 합격 방문, 즉 과거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에 옥새 찍는 것조차 중지하라 하였으나 재상 유숙의 중재로 무마되기도 했다. 이색은 이 일로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공민왕 13년 12월에는 왕실 재정 창고 책임자인 풍저창사(豊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하여 환관들에게 쌀 내어 줄 것을 지시하였는데, 정득년 또한 이지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부를 거치지 않았다 하여 거절하였다. 왕이 또 노하여 그를 곤장 쳐서 유배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재상 최영이 말렸다.


  17년에는 유탁의 상서가 있었다. 왕이 이에 대노하여 유탁을 옥에 가두고 이색으로 하여금 심문케 했다. 이색과 신돈이 유탁을 변호하며 감싸고돌자 왕은 “내가 부덕하다고 여겨 내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옥새)을 가지고 가서 덕이 있는 자를 구해 섬기라. 태조께서 처음부터 어찌 왕손이었는가. 내가 왕위를 피하리라,” 하고서 정비의 궁으로 옮겨가 단식투쟁을 하기에 이른다. 왕 노릇 못해 먹겠다, 며 단단히 토라진 왕을 달래고자 신돈은 이색을 옥에 가두고서 심문하기에 이른다. 억울했던 이색은 울며 "왕의 마음을 움직여 깨달아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항변한다. 이색의 울음 섞인 답변에 마음이 움직인 왕은 이튿날 유탁 등을 불러 사례하고 술을 주며 위로하기를 “내가 노하지 않을 데에 노하여 그대들을 수일 동안 욕되게 하였으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탁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는지 18년 11월에는 노국공주의 정릉에 섣달 제사인 납제가 없는 것이 유탁이 결정한 일이라 하여 그를 하옥했다. 결국 유탁은 신돈 사후에 그의 세력으로 무고되어 처형된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

  재상들은 그들의 회의기구인 양부, 즉 도평의사사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정무를 담당한 도첨의사(중서문하성, 문하부)의 재상, 재정을 담당한 삼사의 재상, 군무를 담당한 밀직사의 재상이 도평의사사를 구성했다. 도평의사사는 국정의 모든 분야를 관장한 재상부로 최고 권력기구였다. 국정의 최종 결정권자는 국왕이었지만 왕명도 도평의사사를 경유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권력욕이 유달리 강한 공민왕에게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러 차례 분을 내며 불만을 표시한 것은 갈 길 바쁜 공민왕이 정국 운영에서 상당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사례로 보인다.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색이 눈물을 흘린 두 번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그의 두 아들 종학과 종덕은 소위 역성혁명군에게 매 맞아 죽고 말았으며 두 아들을 죽여 공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제자 정도전과 정총이었다. 이색은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시절 원의 벼슬을 버리고 고려로 돌아와 가족과 재회한 후 쓴 시를 보면 가족을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구절구절 드러나 있다.


벼슬을 두고 돌아오니 만사가 그만 같고
가족의 반가운 정 나 혼자 누리는구나
(중략)
어린놈 매달려 옛이야기 쫑알쫑알
어여쁜 처 모시 잘라 옷 만들어 다듬이질 뚝딱뚝딱……


이색의 제자이자 원수가 된 삼봉 정도전의 영정

  그랬던 그였기에 두 아들의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슬픔이었다. 여주의 자기 집에 머물 적에, 그를 찾아온 제자와 함께 이색은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제자 앞에서 목 놓아 울고 만다. 망국의 신하요, 자식 잃은 애비가 되어 버린 스승의 참담한 심정을 헤아리고 제자 또한 따라 울었다 한다. 아들이 죽기 전 이색은 조선 건국의 소식을 듣고 이러한 시를 짓기도 했다.


송헌(이성계의 호)은 나라를 세우고 나는 유리되니
꿈엔들 어찌 이럴 줄 알았으랴
이정(정총과 정도전)이 국가 대사에 참여했다 하니
우리 가족은 어느 때 다시 모일꼬


  그 가족에게 드리울 비정한 운명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훗날 서애 류성룡은 목은 이색을 가리켜 한말의 충신이자 아들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던 양표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이색은 위대한 학자였으나 여말선초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개혁으로 마음만 급했던 왕을 모시며, 또 망해버린 조국과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직면하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초야를 방황하며 죽어갔던 한 남자가 흘렸던 눈물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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