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Feb 01. 2020

여자라서 한스러운 사회

<고려사> 안향 열전을 읽고

  원나라 사신 독만(禿萬)이란 자가 안향의 손자 안목의 집에 묵을 때에, 그가 아내를 내친 일에 대해 듣고는 그 연유를 묻는다. 안목이 그 까닭에 대해 소상히 답하자 독만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친숙한 속담을 운운하며 “생각하는 것이 짧은 부인네를 용서하라”고 조언한다. 안목은 이 말에 ‘감동’하여 그 처를 다시 불러와 함께 살았다고 전해진다.

  「대명률」에 따르면, 이이(離異), 출처(出妻), 휴기(休棄)와 같은 이혼의 형태가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성을 띤 이혼의 형태가 이이라면, 출처나 휴기는 칠거 등의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경우를 말했다. 남자가 이혼당하는 것은 아내를 팔았을 경우, 장인 장모를 구타하거나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 등에만 한정되어 남편이 쫓겨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혼보다는, 안목의 예처럼 소박이라 하여 집안에서 별거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경(詩經)」의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구절을 존중하던 사회 분위기 탓이기도 했고, 이혼을 시행하려면 조정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이를 얻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개 이혼으로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명목상의 결혼을 유지한 채 별거 상태에 들어가 사는 편을 택했다.

안향의 초상화(국보 제11호)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당대의 합리적인 이혼사유에 해당하는 조건이었다. 여기에 해당할 경우 여자들은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할 수 있었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것(不順父母), 무자식(無子), 부정(不貞), 질투(嫉妬), 못된 병(惡疾), 수다(多言), 훔치는 것(竊盜) 등이 이에 속했다. 투기하고, 말이 많은 여자라는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남편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아 내쫓을 수 있었다. 규정이 여성에게만 가혹하다 보니, <삼불거(三不去)>라는, 일종의 구제망이 있기는 했다. 조강지처, 부모의 3년 상을 같이 치른 아내, 늙고 의탁할 데 없는 여자에 한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혼이 불가했다. 삼불거 역시 대명률에 명시된 것으로, 철저하게 지켜졌다. 보수적이었던 조선사회는 이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국법에는 이혼에 대한 조문이 아예 없었고, 간통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대체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입장이었다.


  이혼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 초기의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종 때 장진이라는 사람은 부인이 악질에 걸렸다 하여 다른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가 처벌을 받았다. 김봉종은 5촌 사숙과 간통한 부인을 내쫓았다가 도리어 장 80대를 맞았다. 세종은 아들을 못 낳는다며 아내를 내쫓은 대신 이맹균을 파직하여 귀양 보낸 일도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기 시작하자 간통은 당연히 이혼사유가 되었다. 게다가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내가 칠거의 죄를 저질렀다고 따지고 들면 왕의 허락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칠거지악의 출처는 공자의 말씀에 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부도(婦道)를 밝힌 「본명해편(本命解篇)」에 실려 있는 말이라 한다. 안목이 부인을 내쫓은 연유에 대해 당당히 밝혔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으리라. 섬학전(贍學錢) 내기를 꺼려했던 무인(武人)에게 “부자(夫子, 공자를 말함)의 도는 만대의 규범인데…… (이를 어기고) 공자를 무시하겠다는 말이냐?”고 호통 쳤던 인물의 손자다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원나라 사신의 말을 듣고는 안목이 깨달은 바가 있어 부인과 재결합해 살았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훈훈하게 마무리되기는 하였으나, 성리학적 위계질서 위에 형성된 사회의 남녀관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그나저나 원나라 사신 입에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하는 속담을 듣게 될 줄이야. 서양 속담에도 “지옥도 실연당한 여자가 지닌 분노를 갖고 있지 않다(hell hath no fury like a woman scorned)"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의 시선을 위주로 역사가 흘러왔음은 부인하기 어렵겠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들여온 안향의 업적 덕택일까. 성리학의 학문적 깊이 위에 쌓아 올린 사회 속에 살았던 여성들은 한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연이 마지막에 찾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