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를 걷다

홀로, 블라디보스토크⑦

by 한겨울

숙소와 맥주


숙소 내부의 모습. 아기자기하다. 침대 위에 녹색 헝겊(...)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수건이다.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처음에는 호텔을 잡았다가, 어차피 혼자 짧게 지낼 것인데 구태여 경비를 들일 필요가 없겠다 싶어 예약을 변경한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였지만 꼭대기층에 있는 1인실이었기에, 로 지내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실물 크기의 장식용 피아노(!)를 비롯하여 아기자기한 장식이 가득한, 름대로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인테리어 피아노 앞에서. 건반은 고정되어 눌리지 않는다.


숙소는 아르바트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모스크바의 역사적 명소 아르바트 거리의 이름을 따 온 이곳은 관광지와 맛집이 모여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 거리 조성에 우리나라 기업 KT가 투자를 많이 하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은 도시 자체가 그리 넓지 않았다. 독수리 전망대나 신한촌 기념비를 제외면 내가 다닌 관광지들 모두 아르바트 거리로부터 어서 20분 안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여행 전체를 도보로 이동하였기에, 숙소가 제공하는 뛰어난 접근성은 이곳을 최적의 숙소로 여길 만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1박에 3만 원가량으로 가격도 상당히 저렴하였다. 공용 욕실을 써야 하는 아래층과 달리 내가 묶은 방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함께 딸려 있어,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조식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호텔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공용 욕실을 쓰지 않음은 매우 좋은 일이었지만, 여행 중 문득 외로워질 때면 다인실을 이용했으면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잠시 잠깐 들기도 했다.)


아르바트 거리의 모습


항에서 숙소까지는 꽤 힘들게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향하는 107번 버스를 어렵게 찾아 탑승하였는데, 승합차 크기의 미니 버스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는 내부에 더는 공간이 없을 때까지 짐과 사람을 태우고 또 태웠다. 비좁은 승합차에서 여러 사람 사이에 짐짝처럼 실려 2시간이 조금 넘도록(50km가량을) 이동하다 보니 멀미가 나는 느낌이었다. 버스 요금은 내릴 때에 지불하였는데, 검색한 바보다 다소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것 같았으나,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다음 정류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버스를 오래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거슬러 주는 대로 받아야만 했다. 돈이 얼마가 어도 좋으니 이 고생을 다시는 반복고 싶지 않다 여겨, 공항으로 되돌아갈 때는 택시를 잡아 탔다.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미니버스의 모습. (사진 출처: 하나투어)


버스에서 내려서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 지도 어플에 의지하여 10분 여를 걸었다. 거의 모든 길 위에 두껍게 얼음이 얼어 있었기에, 캐리어까지 든 마당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더욱이 조심해야 했다. 1층 리셉션의 직원은 영어를 잘했는데, 여기서 작은 문제가 생겼다. 사전에 호텔 예약 어플로 숙소를 잡았는데, 금액 지불이 미처 되지 않았다며 숙박비를 요구해 온 것이다. 나는 그럴 리 없다며, 어플을 통해 카드로 선결제를 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고는 당황하여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어플에 다시 접속하여 확인해 보았는데,


예약만 하였을 뿐 금액 지불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텔을 예약하였다가 취소하고 다시 이곳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각을 한 상황인 듯했다. 공항의 미니 버스를 이용하며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에 예민해져서였을까, 현금으로 숙박비를 지불하게 되자 꽤나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여유 없이 딱 알맞게 환전해 온 여행 경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덤이었다.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는 주마 레스토랑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한동안 망설였던 것도, 킹크랩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경비를 숙박비로 이미 지출해버린 까닭이었다. 물론 식당에 킹크랩 재고가 없어 불필요한 고민이 되고 말았지만...


바로 앞에서 호텔이나 다름없는 숙소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취소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 생각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계단. 3층의 내 방까지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경사가 6, 70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가파른 계단이 눈 앞에 떡 나타났다. 게다가 계단 칸의 폭 또한 매우 좁아(2~30센티쯤 되었을까?), 계단을 오를 적엔 게처럼 옆으로 걸어야 했고 내려올 때에는 발 뒤꿈치가 들려 있는 느낌에 한 칸 한 칸을 조심해야 했다. 타국 땅의 숙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숙소 바깥을 나갈 때마다 겹겹이 외투를 싸매고 중무장을 하곤 했는데, 그렇게 둔해진 몸을 이끌고 맞이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이 계단이었다.


잠그는 느낌이 좋았던 숙소의 열쇠(왼쪽)와 가독성이 떨어지는 짙은 녹색 종이에 적힌 숙소 이용 안내(오른쪽)


체크인을 할 때에 방의 열쇠를 받았다. 열쇠는 그 옛날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어느 동화책에서 나올 법 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문을 닫고 구멍에 열쇠를 깊숙이 꽂은 다음 소리가 나도록 찰칵 잠글 때에 손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꽤 좋았다.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키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모한 크기의 나무토막 같은 것이 열쇠에 달려 있었는데, 주머니에 넣으면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이 대단했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직원은 열쇠와 함께 어색함 없는 한글 문장으로 표기된 녹색 종이를 내밀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이용 수칙으로, 같은 내용이 영문으로 적혀 숙소 한쪽 벽면에도 붙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방문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래 공지사항들을 읽어주시고 동의 서명을 해주세요.

1. 체크인 시간은 오후 2시부터이며, 체크아웃은 다음 날 오후 12시까지 해주셔야 합니다.
2. 프런트 데스크는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열려 있으며, 갤러리(입장료 무료)와 커피샾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3. 룸 서비스는 이틀에 한 번입니다. 타월은 2-3일에 한 번 바꿔 드리며, 침대 시트는 5-6일에 한 번 바꿔드립니다.
4. 손님들이 객실이나 휴게실에 누워 두는 물건에 대해서 본 숙소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귀중품은 있는 대로 리셉션의 세이프에서 보존할 수 있습니다.
5. 음주와 흡연은 실내 전 구역이 금지이며, 적발 시 3000 루블과 함께 환불 없이 퇴실 조치됩니다. 흡연은 정문 15미터 반경 외에서 가능하며, 꽁초는 꼭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
6. 오후 10시부터는 정숙을 부탁드리며, 타 객실 이용자분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7. 게스트 하우스 이용 요금은 도착 날(이용 첫날)에 지불해 주셔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날 예약 상황을 장담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게스트분께서 체크아웃 날짜 이내에 나가시게 될 경우, 24시간 이내에 문의해 주시면 지불된 날짜만큼의 금액을 환불해 드립니다.
8. 더 저렴한 방으로 옮기시고자 하시는 경우, 차액만큼 환불해 드리며, 요청하시는 그다음 날부터 환실이 적용됩니다.
9. 직원 및 데스크에 통지 없이 지인을 게스트 하우스에 초대하실 수 없으며, 적발 시 벌금 3000 루블과 함께 환불 없이 퇴실 조치됩니다.


상식적인 내용들이었으므로 문제 될 것은 없었는데, 5번 조항으로 인해 내적 갈등을 빚은 일이 있었다. 둘째 날 쇼핑을 할 때였다. 주마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간단하게 저녁거리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둘러보던 중 러시아 맥주에 눈이 갔다. 평소에도 술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지이므로 그 지역의 맥주 맛은 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티카 맥주캔이 가득한 냉장고 앞에 섰다. 500ml의 길쭉한 캔 정면에는 특이하게도 술의 도수가 중앙에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2, 3, 4, 5, 6, 7, 8, 9까지. 종류가 많아 어떤 것을 고를까 고민하던 터에 게스트 하우스 이용 수칙이 적한 녹색 종이가 떠올랐다. 음주를 하다 적발되면 3000 루블과 함께 퇴실조치.


- 삼천 루블이면 우리 돈을 5만 원쯤 되는구나

- 술주정을 하고 사고를 칠 것도 아니고, 혼자서 한 캔인데 무슨 일이야 있을까

- 어쨌든 흔적이 남는데. 나중에라도 버려진 맥주캔이 쓰레기로 나올 텐데

- 벌금과 퇴실 조치라. 그럴 리 없겠지만 쫓겨나면 이 엄동설한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술을 그렇게 잘하지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굳이 무리를 할 이유가 있나


러시아의 국민맥주 발티카. 앞의 숫자가 도수를 나타낸다.(사진출처: http://getabout.hanatour.com/archives/113768)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으며, 어렵게 결론을 내렸다. 마트를 빠져나오는 내 손에는 맥주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숙소에서 홀로 전날 저녁에 포장해온 차가운 감자튀김과 마트에서 함께 사 온 과자를 안주 삼아 그것을 마셨다. 밋밋한 보리 탄산이었지만 그럭저럭 기분을 내는 정도는 되었다. 빈 캔을 구겨 숙소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는데, 캔 위에는


0이라 적혀 있었다.


그것은 무알콜 맥주였던 것이다. 차라리 탄산음료를 마실 걸 그랬나 생각하며, 나란 쫄보는 구수한 그것을 혼자서 홀짝홀짝 잘도 했었다.


발티카 무알콜 맥주. 끝끝내 규율을 지키고야 말았다. 0이라는 숫자가 자랑스럽다. (사진출처: https://www.picomico.com/p/19739588077050625)



해양공원, 바다 위를 걷다


해양 공원. 한겨울의 이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해양공원에 갔다. 둘째 날 오후였다. 아르바트 거리까지 이어진 해안 산책로를 중심으로, 대관람차가 대표하는 작은 놀이동산과 아쿠아리움, 킹크랩과 곰새우가 유명한 크랩 마켓이 인접한 곳이었다.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영하 15도를 밑도는 한 겨울, 일 년 중에서도 가장 추운 날이었다. 대표적인 관광지라는 해양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얼음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대관람차를 등지고 바람을 맞으며 쏘다닌 이곳에선 여행자들조차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바람 소리만 귓가를 가득 매울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크랩 마켓을 기대했는데, 미리 찾아보니 평이 썩 좋지 않았다. 냉동 곰새우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주는데, 위생 상태도 의심스럽고 먹을 도구도 부족하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참았다가 주마에 가서 킹크랩을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것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해양 공원은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얼음 벌판 덕이었다. 아니,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수평선까지 꽁꽁 얼어붙은 바다 덕분이었다.


해안의 모습(왼쪽). 모래사장과 허옇게 얼어 붙은 바다의 경계가 보인다. 얼음 사이에 남은 방파제만이 이곳이 바다임을 말해준다.(오른쪽)


기가 막힌 풍경이었다. 바다가 얼어붙는구나. 그것도 두 발로 바다 위에서 설 수 있을 만큼 두껍고 단단하게 꽁꽁 얼어붙는구나. 그렇게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수평선까지도 두 발로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얼음 벌판을 만들어 놓았구나. 곳곳의 모습을, 바다 위에 서서, 바다 위를 걷는 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바다 위에 내 그림자가 전부 담겼다. 홀린 듯 더 먼바다를 향해 걸음을 지속하다 보니 어느덧 육지가 꽤 멀어져 있었다. 운영을 멈춘 놀이동산의 대관람차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지도 어플을 열었다. 나의 위치를 나타내는 푸른 점이 바다의 영역에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하얀 얼음 바다가 하늘까지 맞닿아 있었기에, 수평선까지 계속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바다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얼음 바다는 견고하게 두 발을 지탱해 주었다. 태양빛이 그 위에 고루 닿았으나 바다를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햇빛을 받아 수평선 부근이 하얗게 빛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 본 적 없던 사막을 떠올렸다. 방향을 잃고 하얀 얼음길을 따라 계속 발을 옮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바람이 차갑게 몰아쳤다. 끊임없이 움직였던 파도의 움직임마저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이 곳의 추위라는 사실. 방향을 돌려 먼바다를 등진 채 육지로 되돌아왔다.

하얀 사막과도 같았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얼어 붙은 바다. 하늘의 색이 아름답다.


시아 제국은 동진을 거듭하며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 항구를 찾고자 애를 썼다. 래서 어렵게 확보한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는 상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상뜨페떼르부르그에서 대륙 하나만큼 떨어진, 모스크바로부터 9천 킬로미터 거리의 변방 중 변방이지만,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가 되는 니꼴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 시베리아 횡단 철도 착공식을 위해 직접 찾을 만큼 러시아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곳도 전한 부동항이 니었다. 내항은 얼지 않지만 외항은 얼어붙어 쇄빙선이 없으면 항구 이용이 어려웠던 것이다. 더 확실한 부동항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우리의 근대사에 나타나는, 조선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쓰는 러시아 제국의 모습도 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블라디보스톡 이외의 확실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저녁에 가 본 금각만의 선착장에는 실제 배들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배들이 다님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바다 역시 가까이서 바라보면 수면에 떠다니는 거대한 얼음조각들을 여럿 확인할 수 있었다. 떤 추위는 바다를 얼리기도 하니, 놀라운 일이다.<계속>


금각만의 바다. 수면에 얼음덩어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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