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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Oct 22. 2020

이십 대엔 시를 쓰고 삼십 이면 소설을 쓰고

결핍된 욕망은 아직도 어디엔가


  태어나 처음으로 창작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을 해 본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계절이었다. 대한민국을 사는 누구라면 한 번쯤은 거쳐가지만 그 이름을 달게 되면 특별한 존재로 떠받드는 시기, 고3, 그중에서도 학기 초의 불타오르던 열의, 계획, 사명감 같은 것들로 당면한 욕망을 거세당한 현실이


 작렬하는 태양의 복사열을 핑계로 하나씩 무릎 꿇고 꺾여 나가던 의지박약의 여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자습을 하고 있는데, 단짝 녀석 하나가 A4 용지 낱장에 인쇄된 글을 스윽 내밀었다. 이게 무어냐 물으니 옆 반 녀석이 쓴


  소설


  이라고 답했다. 소설? 여기저기 많은 손들을 거치며 때 묻은 종이의 구겨진 몰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은 분량. 삼분의 이 정도 되려나. 종이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하고 급히 마감된 두어 단락의 글귀는 조잡해 보였다. 이런 것을 소설이라 할 수 있냐. 빼앗아 들고 읽어 내려갔다. 내용도 조잡해. 어둠 속을 헤매던 남자는 끝내 빛을 찾아 탈출을 감행하는데 실패하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물리적으로만 따져 보아도 반 페이지 분량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이 흑암에서 흑암으로 끝나 버린 이것은, 한반도 고3의 흔한 리얼리즘 자화상이었다. 이런 것을 감히 소설이라 부르다니. 가소롭군.


  수도권의 일반계 남자 고등학교, 그중에서도 공부 못하는 문과였지만 그나마 글 깨나 쓴다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진 몇몇이 있었다. 쪽지 소설을 쓴 이도, 그것을 건네준 이도, 또 그것을 막 읽은 이도 알음알음, 그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자부하는 이들이었다. 묘한 질투가 일었다. 겨우 이런 게 소설이라 불릴 수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하는 마음이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던 생각이었다.


  글빨 깨나 있다 생각했음에도, 고만고만한 대회에서 고만고만한 글짓기 상장을 타 내고 뽐내는 정도가 전부였지,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것은 스스로의 관념 속에서 '타고난 천재의 영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들은 '창작은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이라는 말이 왜인지 모르게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었는데, 우선 뼈를 깎아 본 적도 없고, 앞으로 깎을 일도 없을 것이므로 그와 같은 고통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길도 없었고, 무얼 하는데 뼈까지 깎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만큼 괴롭고 힘든 일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극한의, 고통의, 창작을, 이렇게 쉽게 해 놓고 감히 소설이라 이름 붙이다니. 그런 극한의, 고통의, 창작을 네가 이리도 쉽게 한다면 나 역시도 못할 것은 없기에, 나는 그 길로 그런 극한의, 고통의, 창작에 나서게 되었다. 뼈를 깎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고3,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적기 시작한 이래, 그렇게 20대 중반까지 몇 편을 적게 되었다. 이걸 써서 얻은 인세로 먹고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붉은 장밋빛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미래였다. 그리고 막연한 희망이라는 게 늘 그렇듯 지금의 삶은 그 근처에 털끝 하나 닿지 못한 채로 남았다. 한국형 반지의 제왕을 남겨 보겠다며 야심 차게 기획하였으나 무협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장르가 되어 버린 이야기 하나는, 죽 쓰다보니 A4용지 100장을 넘겼다. 새내기들의 글쓰기 교양 수업을 맡은 국문과 교수는 과제로 제출한 그것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수준을 떠나서, 이만큼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글을 쓰는데 최적화된 공간이었던 군대에서, 당직을 서면 밤을 새워 글을 쓰곤 했었다. 새벽에 순시를 나온 대대장은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워드프로세서 창을 척 바라보더니 한 마디 했다.


  야한 것 쓰고 돌려보지 마라.


  야한 것이라. 그때 나는 성서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애를 주제로 소설을 쓰는 작업은 즐거웠다. 본질적으로 나는 인간의 실존을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사립학교 정교사 최종 면접 자리에서 머리가 허연 법인의 이사, 교장들 열댓 명 앞에서 질문을 받았다.


  "대학교 교지에서 주관한 문학상을 소설을 써서 수상하였다던데, 줄거리가 어떻게 됩니까?"

 "현대 소설 장르고, 연애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에 대해 다루고자 한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거 말고, 줄거리가 어떻게 되냐니깐."

  "어... 여자 친구가 자살을 하였는데, 주인공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내용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교육 목표를 가지신 그분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역시나 불합격. 소설을 읽은 지인들은 그 안에서 나의 실제 연애담을 찾아내는데 혈안이었다. 교내 문학상의 심사를 맡은 소설가는 내 글에 '우수 없는 가작'을 주며 저런 류의 평을 달았다.


  진부할 수 있는 문장들은 어느 순간 감각적인 문장이 된다.

  앞으로 많이 써 보며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는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윤동주를 사랑했던 나는, 그를 담은 영화를 조조로 보고 나와, 백주 대낮의 부서지는 햇빛 속 어느 사람 많은 공원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었다. 그의 젊음에 대한 찬사이자 때 이른 죽음에 대한 비통이었고, 별빛 같은 재능에 대한 동경이었다. 무엇보다 요절한 그의 나이를 막 지나온 자신에 대한 설움이 겹쳐 흘렀다. 그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시간들을 훌쩍 지나온 지금은, 글쎄, 그때와 같은 눈물이 내 안에 남아 있을까.




  그리고 더는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쓰지 않는다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려나. 이십 대의 목표는 불확실한 미래를 안정의 뜰로 옮겨다 놓는 데 있었다. 어쨌든 인세로 먹고살고 싶다는 욕심은 낭만적인 몽상이었다. 실력보다는 더욱 거대한 운의 힘으로 나는 자리를 잡았고, 또 이어지는 몇 년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몸부림쳤다. 저녁이 있는 삶을 첫 번째 이유로 삼은 직업이었는데, 막상 저녁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흐르는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어디선가 들었다. 나이가 있다 했던가. 시인의 절정은 이십 대요, 소설가의 완숙은 삼십 대에 이루어진다고. 한 작가의 마스터피스가 대개 저 나이 때에 나오는 경향이 있다는, 아마도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시작이라 할 만한 것을 진행한 바가 없는 내게 완숙은 요원한 단계다. 가끔, 아주 가끔 학생들이 물으면, 눈을 감고 지나온 세월을 오래도록 반추하는 늙은이처럼 선생님도 한때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고 말을 할까 망설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요즘은, 어떤 것도 쓰지 않는 나는 더는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다시, 글쓰기 상을 타 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던 어느 남고 문과의 그네들 이야기. 내게 A4지의 자투리 소설을 건네었던 친구는 국문과에 진학하였다. 작가의 꿈을 안은 채였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던 듯, 생뚱스럽게도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내더니 무수한 진로의 고민 끝에 로스쿨까지 갔다. 건너 건너 알고 지내던,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쓴 그 친구는,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는 이십 대에 시를 썼다. 그의 소설을 건네준 단짝이 자기네 국문과 교수에게 들은 바를 그대로 인용하면, '한국 문단을 이끌 차세대 젊은 작가' 취급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고 했다. 몇 번 그의 시를 찾아 읽어 보았다. 아마도, 가소롭군, 하고 고3 때와 비슷한 말을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상은, 글쎄. 도통 모르겠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시가 이렇구나. 몇 년 전 군대에 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나왔을 것 같은데 또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찾아보니, 얼마 전 또 하나 시집을 더 내었구나.


  나는 아마 문인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왜 이리 비관적이냐고? 소설가 김연수의 말을 빌리면 될 것이다. 쓰는 순간 작가가 된다. 쓰지 않는 나는 작가일 수 없다. 그래도 고맙다고 해야 할까. 브런치라도 나를 작가라고 불러 주니? 글을 쓰고, 가끔 조회수를 보고, 그리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의 반복은, 그 옛날 싸이월드에 다이어리를 적을 때나 크게 다르지 않은 패턴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적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오롯이 이루지 못한 그것을 위한, 결핍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의 결과물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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