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by 농어


나에겐 오래된 여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학원을 다니다 우연히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어 그 뒤로 주욱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대학의 같은 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우리의 우정은 깊어져만 갔다. 정확히는 우정과 함께 나의 조금은 슬프고도 긴 짝사랑이 깊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아담한 키에 하얗고 통통한 체형이었다. 순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입은 거칠었고, 언제나 통통 튀는 매력이 있어 주위에 언제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치여서 길은 잘 못 찾았지만 길을 찾아줄 친구가 옆에 있었고,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해설을 해 줄 내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종종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프레첼 과자를 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그리고 애인에 대한 얘기까지도. 그녀의 첫 번 째 남자 친구는 내가 아닌 같은 과의 다른 동기였고, 그는 남자들끼리의 자리에서 술만 마시면 여자 친구와의 스킨십을 언급하는 녀석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선 서로 친한 티를 별로 내지 않기로, 서로의 인간관계를 국한 짓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저냥 동기처럼만 지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서로에게 들은 얘기를 전할 수 없었다. 마치 고고하게 하늘을 관망만 하는 관측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 빛났다. 그와 오늘은 어디에 갔으며, 무엇을 먹었고, 뭐가 좋았더라. 너도 여자 친구 생기면 꼭 가봐라 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언젠가 생기게 된다면.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수는 적었고, 표현은 서툴렀으며, 약간은 허여멀건 피부에 가는 팔다리는 도저히 남성적인 매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나에게 묘하게 시기마다 다가오는 여성이 한 둘은 있어서 거절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그녀들과 연애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녀가 추천해줬던 좋았다고 이야기한 장소에서 그녀들과의 데이트를 즐겼다. 동시에 죄책감이 언제나 등 뒤에 붙어있어, 침대에 누워도, 의자에 앉아도, 혹은 운동을 하더라도 항상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나의 연애를 항상 궁금해했다. 도대체 걔네는 네가 뭐가 좋아서 만나냐 만나서는 뭘 하냐 스킨십은 제대로 하고 있냐 등 자신이 가진 정보 안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군대를 가게 되었다. 고작 나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당시에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 친구는 울며 나쁜 새끼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묘하게 언제나 짊어졌던 죄책감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군대를 가기 전 날에는 그녀와 술을 마셨다. 그녀는 웃다가 울었고, 울다가도 울었다. 내가 편지는 못써줘도 예쁘게 하고 면회 정도는 가줄게. 허리에 짐짓 손을 올리고 울며 말하는 모양새가 퍽이나 귀여웠다. 나는 나직이 네가 지금 만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야.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첫 휴가 날에, 그녀는 울면서 그 새끼는 진짜 나쁜 새끼였다고 욕을 했다. 자기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가뜩이나 좁은 과에서 자기만 완전 이미지를 버렸다고, 이제 학교도 혼자 다닌다고 했다. 너 같은 순둥이가 최곤데 나도 참 남자 보는 눈이 없나 보다고 그녀는 말했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설레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학교를 다녀도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우리 사이의 ‘선’을 넘지 않았고, 그게 우리를 친구로서라도 영원히 볼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취업을 했고, 세 번의 연애와 세 번의 이별을 더 하고도 내 옆에 있었다. 나 역시도 세 번의 연애와 이별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더욱 닮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만났다. 퇴근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리고, 이제는 조금 요리다운 요리가 나오는 술집에서 밥과 술을 즐겼다. 기분이 좋은 날이었는지, 그녀는 과음을 했고, 발그레한 얼굴과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지긋이 눈을 맞추던 그녀는 말했다. “나, 사실 너 좋아한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환희와 동시에 지독하게 으스러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관계는 시작하면 반드시 부서진다. 부서진 관계는 반드시 시작을 향한다.


우리는 위태롭게 사랑하고, 슬프게 노래 불렀다. 나는 매일 밤 떠나가는 그녀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녀를 품에 안으며 행복에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 만에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나 오래 서로를 바라봐 왔건만, 서로가 보는 곳이 결국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회사를 퇴사했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고, 결혼을 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나의 10대와 20대는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똑같은 삶을 시작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혼자서.

어느 날, 조카의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였다.

조카는 어디선가 내 책을 한 권 들고 와서 나랑 놀아달라며 칭얼거렸다.

책에는 사막과 신기루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삼촌.”

“왜?”

“여기, 이 신기루는 뭐야?”

“사막에 가면, 빛이 굴절돼서 엉뚱한 데에 오아시스나 도시 같은 게 보이는 거야.”

“그럼 거기엔 뭐가 있어?”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거기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나는 책을 덮었다.

“삼촌, 왜 그래?”

“대신에, 신기루에 비친 건... 어딘가 있을 거야, 어딘가.”

10대와 20대의 나의 모습을 가지고라는 뒷말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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