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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Nov 12. 2020

조지오웰 <더 저널리스트>, 나는 나의 오늘을 쓴다

읽기의 자율주행

조지 오웰의 <더 저널리스트>를 읽었다. 평생 많은 글을 썼던 오웰은 익히 알려진 두 소설 <동물농장>, <1984> 외에도 수많은 에세이와 르포 등을 썼다. 이 책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옵저버>와 <트리뷴>지에 그가 기고한 칼럼들을 주제별로 모아 엮은 것이다. 역자는 이 책에 대해 ‘가장 오웰다운 생각이 담긴 저널리즘 작품 모음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평등
진실
전쟁
미래

표현의 자유


책은 이렇듯 여섯 개의 주제로 칼럼을 분류하고 있는데, 주제는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지만 그의 글은 몇 개만 제외하고는 시대적 배경들을 아주 자세히 알지 못해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패한 정치인, 사기꾼, 가해자, 반역자를 뽑는 국민은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자들이다 - 조지 오웰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고 스페인 내전에도 자원 참전한 바 있는 열정적이고 깨어있던 지식인  조지 오웰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의 신랄한 저널들을 통해서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굽힐 수 없는 열정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래 인용한 구절에 그의 이 같은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1930년 즈음부터 지금까지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 문명이 존속할 거라는 사실을 믿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현실 정치를 포기한 채 산속으로 들어가 구원받는 삶을 기원하거나 자급자족 커뮤니티를 만들어 원자폭탄이 세상을 휩쓸어 버릴 날에 대비하라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정치적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는다. 죽을 게 뻔한 환자라 하더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처럼 말이다. “
(본문 21페이지)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1. 평등

오웰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유색인 차별, 인종혐오, 제국주의, 여성과 남성, 소수민족, 종교 등등 그 어떤 차별에도 반대했다. 약간 의외의 부분에서조차도. 예를 들면 이런 지점,


“‘민간인 살상’, ‘여성과 아이들의 잔인한 살육’, ‘인류의 문화유산 파괴’ ... (중략) 사람들은 지상전보다 공습이 이 끔찍한 짓의 주범에 더 가깝다고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군인보다 민간인을 죽이는 게 왜 더 나쁜 일인가?

(중략)

지금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시대다. 어차피 전쟁이 벌어져야 한다면 젊은 남자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인구가 골고루 제거되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을 (트리뷴, 1944. 5.19)


어쩐지 ‘여자도 군대 가라!’를 넘어서 ‘노인도 어린이도 다 총을 들어라!’라는 외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죽하면’이라는 마음이 든다. 그의 평등에 대한 강한 신념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철폐하되, 모든 종류의 책임도 동일하다, 하는 의지를 지녔던 듯하다.



2. 사회주의

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우리가 오늘날 떠올리는, 하나의 당(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고 독재자가 다스리며 강제수용소나 비밀경찰을 보유한 그런 종류의 세상이 아닌, 그가 꿈꾼 사회주의 세상은 평등의 세상, ‘동지애’가 살아있는 그런 (꿈결 같은) 사회였다.

구체적으로 오웰이 꿈꾸던 사회주의 사회의 조건은 이런 것들이었다.

- 토지를 비롯한 주요 산업의 국유화
- (조건하에서의) 개인 소득 제한
- 교육시스템을 민주적 체계로 개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라면, 사회주의는 자본과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부정하고,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솔직히 독재가 아니고서야 이러한 사회가 가능할 수 있을까. 1950년 사망한 오웰은 소련의 해체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 사회주의는 라퓨타처럼 천공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향일 뿐이고 그가 꿈꾼 ‘동지애’가 살아있는 세상은 여기 이곳에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으로만 남아있는 것 같다.


3. (1) 미래 : 유토피아 (희망적 관점)

‘태양 아래 새로운 게 있는가’라는 제목의 1944년 2월 25일 자 트리뷴 지의 칼럼을 읽으며 감동했다.

모든 것은 과거에 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주장 , 즉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주장의 뿌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오웰은 비판한다. 순환 우주처럼 계속 반복된다는 개념은 수 구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되며, 전쟁도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과거는 어떻게든 되돌아온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닥칠 미래 또한 그들에게 친숙한 미래일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의사를 가지고 동등하게 대접받는, 그런 끔찍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없던 것은 미래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본문 125페이지)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주목하는 내용은 끊임없이 변한다. 예를 들어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은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주창하기 전에는 크게 영향력이 없던 구절 아니었던가. (중략) 누구도 그 구절을 읽고 법과 종교, 도덕률이 재산 소유관계 위에 있는 상부구조라고 추론하지 못했다.
(본문 126페이지)


마르크스의 이러한 주목과 분석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이 정치인, 종교인, 재판관, 윤리학자, 자산가의 행동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들 행동의 근원에 보물-돈-이 있다는 의심)

​즉,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주장은 마르크스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듯 태양 아래 새로운 생각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관점은 21세기의 새로운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3. (2) 미래: 디스토피아 (비관적 의심)

오웰은 제임스 버넘(미국의 정치 경제평론가)이라는 사람의 글들을 인용하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은근히 암시하고, 또한 우려한다.


“버넘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변화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지배계급이 또 다른 지배계급으로 교체되는 과정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망할 운명이며, 사회주의는 환상일 뿐이다.”

“다음 50년간 대중을 개돼지로 부리는 주체의 이름이 경영자인지 관료인지 정치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질문은 이제 퇴출이 명백해진 자본주의의 빈자리를 과두제가 대신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대신할 것인지다.”
(본문 마지막 페이지)



오웰이 겪지 못한 ‘다음 50년’은 공산주의의 패망과 자본주의의 고도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진 시대였다. 다만 대중을 개돼지로 부리는 주체가 경영자나 관료나 정치인의 어느 한 부류가 아닌, 그 세 부류가 잘 짜인 합성섬유처럼 ‘결탁한’ 무리들이라는 점, 진정한 민주주의는 거의 오지 못했다는 점이 그가 전망할 수 없었던 지점이었다.

그는 비합리적인 시대를 바라보며 합리적으로 생각했고, 동지애가 넘치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꿈꾸었고, 생활의 최전선(설거지에 대한 고찰 편에서 절절하게 느껴진다)에서 매일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모든 지면에서, 모든 문장들에 그런 것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책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나는 나의 오늘을 쓴다.”



이 문장이 책을 펴 들게 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남겨진 그의 글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가 그의 오늘을 살았듯, 오늘의 우리도 자신의 오늘들을 써내는 것. 쓰는 것은 사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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