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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Nov 11. 2020

펄벅의 대지,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

읽기의 자율주행


[대지] 읽었다.  30 만에 다시 읽은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 자신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을 들은  있는데 많이 동감한다. 중학교  집에 계몽사에서 나온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계 문학 시리즈가 있었는데 괴테를 처음 만났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  '세상 모든 문학들이'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하얀색 하드커버의 , 어린 내가 느끼기로는 상당히 세련된 표지를 갖고 있는 책들이었다. 10 초반의 나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리하여 대부분의 책들을 서너  읽었고, 그렇게 대가들의 문장을 읽으며 그것들이  안으로 차례차례 흡수되고 쑤셔 넣어졌다.  안에  벅의 [대지] 있었다.




시리즈 중에서 유일한 중국 배경의 소설이었고, 펄 벅이 중국사람이라고 당시 오해하고 있었다. 청소년기에 [대지]를 읽은 충격은 뭐라 말할 수 없이 강해서 돌아보니 살아오는 순간순간 그것을 뇌 한쪽 귀퉁이에 늘 갖고 다니며 성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때때로 왕룽의 삶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고, 왕룽의 예쁜 첩을 묘사한 부분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배가 고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잡아먹는 사람들을, 죽은 채 태어난 아기를 버리자 들개들이 몰려들던 광경을 나는 쭉 지니고 살았던가 보다.




왕룽의 못생긴 처 오란에 대해 그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었다. 예쁘지 않아서 남편의 사랑을 끝까지 받지 못했던 아내 오란이 불쌍하다, 정도로 지나쳤다. 30년 만에 다시 읽으며 그 오란이 왕룽만큼이나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란의 죽음 부분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노라니 아이가 깜짝 놀라 쳐다본다. 그녀의 삶이 어찌나 서글픈지... 아마 중학생의 내가 결코 헤아리지 못했을 그 여인의 감정을 지금에야 읽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오란이 막 왕룽에게 시집와 묵묵히 살림을 하고, 농사를 돕고, 아이를 하나하나 낳기 시작하던 젊은 날에 그녀가 어떻게 살고 죽어갈지 조금도 알 수 없었 듯, 어린 중학생인 나는 어떠한 일이 내 인생에 펼쳐질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30년 후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살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이 매일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브래들리는, 시간은 미래에서 우리를 향해 흘러오는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고 시간이 흘러오든 가만히 있는 시간을 우리가 헤엄쳐가든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므로.




우리는 문명의 풍요로움 속에서 세련되고 교묘하게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거나 괜찮게 합리화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하지만 왕룽과 오란과 [대지]의 수많은 군상들은 필터 없이 드러내고 탐욕스럽게 손가락에 쥐며 시기하며 부끄러워하고 또 비참해한다. 결국은 포장 안을 들추어보면 동일한 것이다. 경건하게 새벽 기도에 나가든, 108번 절을 하든, 점집에 가든 사람 안의 욕망이란 결국 왕룽의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이 작품의 제목이 [대지, The good earth]라는 것은 충분히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




왕룽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아들들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땅을 팔려고 하는 생각을 알게 되자 왕룽은 절규하며 말한다.


우리는 땅에서 왔고 우리는 그 땅으로 돌아가야만 해. 아무도 땅을 빼앗지 못해.


이는 선교사 부부의 딸이었고,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과 달리 중국 민중들의 삶으로 뛰어들었던 부모를 둔 펄 벅에게 내재한 기독교적 신앙,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19)'는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서 소년이 되고 소녀가 되고, 한 사람의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죽는다는 것이 참 슬픈 일이라는 것을, 왕룽의 곁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다시 느낀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시기라고 하는데, 신해혁명의 발원지가 지금 바이러스로 도시가 파괴된 우한이라고 하니 이 또한 묘한 접점이 아닐까. 누군가와도 나눴던 이야기지만 가장 적합한 시기에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나에게로 온다는 것.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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