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특징을 교과서에서는 유교문화로 정의한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어른을 공경하며, 서열을 중시하고, 상명하복식의 사회구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한국의 문화 형성에 영향을준건 다름 아닌 숫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전쟁이 만든 문화나 언어 습관을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다.
전쟁이 만든 문화는 유교나 불교 이상으로 우리나라 문호에서 뿌리깊고 보편적이다.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자.
한국인들은 큰 뚝배기나 국냄비에 같이 숫가락을 넣어서먹는게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인들 중에는 반찬과 국을 같이 먹는 식습관은 좌식과 함께 한국 식당을 멀리하는 대표적인 이유로 꼽히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중심의 농경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유교문화의 산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1인 1상 또는 2~3인 겸상이 최대이다. 한사람이 상을 따로 차려 먹는게 일반적이었고 매일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할아버지와 손자가 겸상하고 남편과 시동생이 겸상하고 아내와 시어머니가 겸상하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풍속을 보아도 잔치상은 1인 1상으로 그려져 있다.
한상에 온가족이 둘러 앉아 먹게 된건 6.25가 낳은 산물이다. 피폐해진 경제력과 너무나 다급한 주변환경으로 더 이상 1인1상을 차려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온가족이 둘러앉아 한상에 먹는 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중국인들이 볶은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도 사실은 전쟁 때문이다.
이들은 뭐든지 기름에 볶아 먹는다.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식문화인데... 중국은 전시에 강제 징집된 군인에게 보급을 거의 주지 않았다. 대신 큰 철판을 불 피워놓고 각자 알아서 요리해 먹도록 하였다.
지금도 철판 요리를 몽골요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나라 이후에 군인들이 그날 약탈한 식량을 모두 모아 철판에 볶아 먹었다. 이후 중국에 볶음 요리가 대중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처럼 한살차이가 엄격한 나라가 많지 않다. 한살만 많아도 절대복종 관계가 수립된다.
왜 이럴까?
이는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면 금방 공감할 수 있다. 군대에서는 한달만 먼저 입대해도 상급자가 되고 명령권이 주어진다.(현재는 국방부 인권위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와 똑같은 서열방식이 나이이다. 나이가 많으면 조직 통솔권이 주어진다. 이런 엄격함이 필요한 이유는 군대란 출신과 역량이 모두 다른 이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효율적으로 군대를 조직화하는 것은 경력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이다. 한민족은 역사상 나이가 되면 무조건 군대에 징집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모두 모병제를 유지했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많으면 군사 훈련을 적어도 한번 이상은 더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수없는 외침을 받아온 우리 민족은 역사상 수도 없이 전쟁에 징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생판 모르는 이들과 함께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가 상급자인지 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서열과 관계성으로 빠르게 명령권을 부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따라서 군대에서 하던 서열 방식이 그대로 나이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나이는 계급을 의미한다.
한국 사람처럼 자기 임무에 치열한 근로자는 없다. 부지런한 것으로는 이미 유대인을 이겼고, 독종이라 불리던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근로시간은 당연히 일본을 앞선다.
한국인들은 3명이 할일을 직장내에서 부여하면 2명을 더 추가 고용하는게 아니라 야근으로 2명분을 메꾼다. 모든 직장이 그렇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직장이 그렇다.
최근엔 선진국화 되면서 이런 문화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이렇게 임수완수에 철저한 나라는 한국인밖에 없다. 따라서 직장에서 과로사 하는 비율도 세계적이다.
특히나 다른 나라는 강제노동으로 과로사하는 반면 한국인은 스스로 야근하다가 과로사 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상명하복 역시 유교문화에서 유래되었지만 같은 유교권인 중국과 일본 한국은 양상이 다르다. 중국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이 더 많은 나라이고, 일본은 근현대사를 제외하면 전쟁역사가 우리나라보다 짧다.
반면 한국인들은 월남전에서 확인했듯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집념이 무척이나 강한 민족이다. 이거는 다른나라와 비교가 안된다. 한국인들의 DNA에는 철저하게 '전쟁 = 승리' 가 새겨져 있다.
물론 전쟁을 술렁술렁 하는 나라나 민족은 없다. 하지만 유럽 등의 전쟁을 보면 지도부가 무너지면 군이 와해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한국인들은 지도부가 무너져도 남은 병력이 다시 재집결해서 싸운 사례가 빈번하다.
대표적인 것이 대몽항전이고 역사상 몽고군에 그렇게 지독하게 저항한 나라는 없었다. 임진왜란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는데도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이런 나라 역시 역사상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다.
침략당하는 일이 많았던 우리민족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조혼 풍습이 생겨났다.
첫째는 높은 남성 사망률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특히 조혼이 정착화된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인데, 청군에게 여자들이 약탈당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청나라에 끌려가면 살아돌아와도 '화냥년'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 유부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대적인 조혼이 장려되었고, 이는 조선 후기 여성 인권을 바닥으로 내몰았다. 여성은 남편 없이는 사회적인 활동을 거의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남녀가 평등했던 조선 초기 중기와 다르게 조선후기는 완전한 가부장제가 성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딸에게 상속도 인정했던 조선이었는데, 딸은 시집가면 출가외인이 되어버렸다.
남편이 없으면 사회적인 소속과 보호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귀속되었다.
분명 전쟁은 여권에 악영향을 준다. 일단 전쟁에서 결혼적령기에 남자가 다수 사망하는 것도 치명적이다. 전시 상황에서 여자의 결정권이나 참정권이 박탈되는 것은 물론 전쟁이 끝난 후 남자의수가 줄어들면, 결혼이라는 거래에서 생존 남성의 선택권이 강해지는 것도 추가적인 요인이 된다.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는 누가 정했을까?
고대 유럽의 경우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느 순간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가 공식화되었다.
이것 역시 전쟁 때문이다. 우선 바지를 입어야 말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중세까지 전쟁의 핵심이었고, 유럽의 경우는 귀족만 기마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 전쟁을 뒤늦게 경험한 유럽은 중세를 지나서야 남자는 모두 바지를 입게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훨~~씬 그 이전에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도 바지를 즐겨입고 위에만 치마를 걸쳤는데, 여자든 남자든 우리민족의 바지 입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됬을 걸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인만큼 전쟁을 많이치러본 민족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책에 기록으로 보면 중국이 더 많을 거 같지만,,, 전략의 대명사인 제갈공명과 중국 역사장 가장 존경받는 왕중 한명인 당태종도 한민족과는 절대 전쟁을 하지 말라고 신싱당부를 했다는 고사가 내려온다.
동물의 경우 숫컷이 깃털이나 갈기 뿔 등이 더 화려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여자가 훨씬 치장을 더 많이 한다. 실제로 고대와 중세는 남성의 의복이 더 화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전쟁은 남성의 치장과 장신구를 최소화시켜버렸다.
경험많은 사람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말한다.
산전 수전이란 산에서도 물에서도 다 싸워봤다는 뜻이다.
한국어에는 유독 전쟁용어가 많다. 일일이 예를 들기 벅찰 정도이다.
적의 '아성을 무너뜨리다' 에서 아성은 성의 지휘관이 머무는 보루를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성은 대부분 2중 내지 3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가장 중심에 구조물이 바로 '아성'이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면 '결전의 날이 밝았다'고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중에 하나이다.
일상에서 면접이나 PT발표 하나면 해도 가슴이 조근거리는데 과거 군인들이 잠못 이루다 '결전의 날이 밝았'을 때 심정은 어느 정도일지 헤어리기 힘들다.
앞으로 한국에 전쟁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