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생각> 5가지 책읽기
독서모임에 나갔다가 깜짝 놀란 경험이 몇 번 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다양한 시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넉넉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식적인 선도 있지 않은가.
책을 엉터리로 읽는 독자의 '보편성'에 내심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어느새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듯한 분위기는 또 어쩔 거냐.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긴 했지만
내가 독서에 대한 주관이 매우 뚜렷한 사람이란 걸 받아들여야 했다.
나의 독서는 단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독서관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에게 수줍게 꺼내어 놓아 본다.
첫번째 독서는 글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흔히 독서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은 '이 문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어'의 뜻을 몰라 포털사이트나 사전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문장의 뜻뿐 아니라 전체적인 문맥을 종합하여 의미를 이끌어내야 하는 글도 있다.
서양 인문학 서적 중에는 하나의 결론을 두고 그 근거와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한참을 읽다 보면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지 잊어버릴 지경이다.
'그는 행복하게 죽었다.'와 '행복하게도, 그는 죽었다.'처럼 수식어 하나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수식어를 걷어내어야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글도 있다.
두번째 독서는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고급독자에 이르는 단계이다. 저자는 모든 의미에 단어와 문장을 할당하지 않는다. 마치 아직 서먹한 관계인 애인과 데이트할 때 '자장면 괜찮아?'라고 물으면 '응 좋아'라고 할 때 그 애매한 뉘앙스를 읽어 적당한 메뉴를 골라야 하는 것과 같다. 활자로는 써지지 않았지만 숨은 의미가 얼마든지 있다. 모임에서 남들은 다 웃는데 나만 웃지 못하면 소외감이 들듯이 독서에서도 저자의 위트와 어조와 어감에서 적절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면 독서는 심심해지게 된다.
셋째는 비판하며 읽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비판'은 가당치 않다. 종종 저자의 의도를 다 읽어내지도 못하고서 그의 유명세에 맞서는 분들이 종종 있다. 독서에서는 맹목적 숭배도 무조건적인 반대도 권장되지 않는다. 모든 책은 좋고 싫고를 떠나서 공정하게 읽은 뒤에 비판은 뒤로 미뤄야 한다.
올바른 독자가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우선 꺼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보다는 다른 책이면 좋다. 가령 영문학의 고서를 여러 권 읽은 뒤에 '한여름밤의 꿈'이나 '가든파티' 등을 비판한다면 독서는 더욱 풍성할 것이다.
또한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잘 모른다고 해도 톨스토이를 잘 안다면 얼마든지 그와 비교하여 도스토옙스키를 비판적 시각으로 읽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많은 분들이 맹자의 「성선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선(善)과 유교에서 말하는 선의 개념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있음을 간과한다. 또한 유교의 선(善)과 도교에서 말하는 선(善)을 비교하여 공부하면 동양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선(善)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착하다'와 다소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성선설」이 달라 보일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책과 종합 하고 비교하며 읽게 되면 독서는 폭이 넓어지고 힘을 얻게 된다. 책 한 권으로 시대를 읽을 수도 있으며, 해당 분야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도 있다.
넷째는 마침내 모든 독서 뒤에 숨은 커튼을 걷어내는 단계이다. 늘 책의 저자는 화자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조정하고 획책하기만 한다. 네번째 단계에 이른 독자는 이 숨어있는 저자를 응시해낸다.
저자가 왜 이렇게 주장하는지, 이 부분에서 문장이 왜 짧아지며, 이 부분에서는 왜 다른 표현을 제쳐두고 이 어휘를 사용했는지를 낱낱이 읽어내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에 이르는 데는 자신이 글을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래야 저자가 감추려고 하는 의도조차도 미안하지만 독자는 읽어내고 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저자에게 압도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등하게 대화하는 위치로 탈바꿈한다.
이것은 절대로 저자를 까내리는 거만이 아니며, 오히려 독서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능동적인 독서이다.
네번째 독서에 이르면 드디어 독서의 고수라고 칭할만하다. 또한 이 정도까지 이를 동안 상당한 독서량을 확보했을 터이므로 그 분야의 전문가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혹시나 이 경지에 이른 분이라면 여러 분야를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분야라도 자신이 가장 잘아는 분야를 가지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폭넓기만 하고 깊이가 없는 독서가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번째 단계의 독자라면 한 분야의 책만 보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권했을 테지만, 네번째 단계의 독자에게는 지식의 량이 반드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통찰의 깊이가 네번째 단계의 독자에게는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된다.
물론 시대여건상 급하게 네번째 단계의 독서를 하게 된 무리(?)들이 있다. 요즘은 워낙 언론의 장난이 심하고 의도가 빤히 내다보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원하지 않게 네번째 단계의 독서를 배우게 되었다. 언론 기사보다 그 아래 달린 댓글이 더 정확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참으로 개탄할 사회상이 아닌가. 음모론이 널리 유행하는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쉽게도 나의 깜냥으론
네번째 독서가 독서의 끝판왕은 아니다.
네번째 독서에 이르게 된 사람이라면 이미 걸어다니는 사전, 똑똑하다, 아는 것이 많다,,, 는 수식어는 흔하다.
여기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독서는 얼마나 깜깜한가?
네번째 독서가라면 늘 책이 자기 옆에 붙어 다니는 사람이다. 언제든 가방 속에, 한 손에 책 한 권은 기본이다. 집에는 머리맡과 책상 위에 읽던 책이 널려있다. 심지아 화장실에 책을 두고 틈날 때마다 읽는 분도 있다.
다섯번째 독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읽던 책을 잠시 덮어야 한다.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세상과 어울리고 세상과 맞부딧이며, 책 속에 가둬놓았던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꺼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섯번째 독서가는 책 안에 세상이 있다는 말에서 벗어나게 된다. 언제나 그랬든 책도 세상의 일부이다. 세상의 대체물이 되지 못한다.
자연보다 앞서는 진리는 없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책이 세상보다 앞서는 일도 왕왕 일어나지만 대게는 세상이 책보다 늘 먼저 변한다. 그 변하는 세상을 보고 대부분의 책이 씌여진다.
세상과 사람과 자연이 다섯번째 독서가에게는 책이다. 늘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시대를 읽고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자연과 자연의 이면에 숨은 시와 문학을 읽어낸다. 눈 닿는 곳이 모두 활자요, 가는 곳이 모두 책의 한 페이지 이다.
책은 늘 현상의 모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고 하였다.
도를 도라고 하면 왜 안되는지는 노자에게 여쭤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책과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치와 윤리와 진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섯번째 단계에 이른 독자가 자주 책을 덮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