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무협소설을 즐겨 읽었다. 당시엔 책 대여점이 동네에 몇 개나 있었다. 일반적인 책 한 권 빌리는 데 700원, 만화책은 300원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로 동네까지 와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자연스레 책 대여점에 들어가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빌려서 집으로 가곤 했다. 당시 친구들은 판타지 소설에 더 열광했지만, 나는 왠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서사는 대체로 비슷했다. 고귀한 가문의 혈통인데 어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거나 생사를 알지 못한 상태로 떨어져 살게 된다. 그리고 생고생을 하다가 아직 어린 나이에 기연을 얻어서 엄청난 내공과 무공을 갖게 된다. 그리고 신분을 확인하고 나중에는 사파의 대마두를 처단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간혹 부모님을 잃었다가 사파 오랜 고수들의 손에서 길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신분을 회복하고 정파의 가면을 쓴 악당을 물리치고 정과 사를 아우르는 정점에 서게 된다.
이런 무협지를 보면 ‘위기=기회’라는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 주인공이 상대방과 대결을 하다 열세에 몰려 절벽에서 떨어진다든지 하면 반드시 기연이 기다리고 있다. 영물을 만나서 물리치고 영단을 얻는다든지, 은둔하는 선대 고수를 만나 그의 후계자가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 자신에게 패배를 준 상대를 물리친다.
이쯤되면 주인공은 뭘 해도 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시련을 제외하고는 모든 우주의 기운이 그의 성공을 돕는다. 그리고 그 성공은 상당히 젊은 시절 완성된다. 무공이 무림 제일인데 고작 약관의 나이에 불과하다. 무협 세계에서 무공의 우열에 나이가 필연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경력을 뛰어넘는 실력은 대체로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의 경쟁상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모든 서사를 뒤엎고 색다른 설정과 전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묵향>이라는 무협지도 있다.)
문득 교직에서 경력과 가르치는 일에 대한 내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경력이 많으신 선배 교사들을 보면 엄청난 내공을 엿볼 수 있다. 질서 정연한 아이들, 깔끔한 교실, 평온한 하루....
그렇지만 무협 세계에서 나이가 내공이나 무공의 보증수표가 아닌 것처럼 교직에서도 경력이 교사로서의 능력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점은 나 스스로를 생각할 때 느낀다. 신규 시절에는 10년차만 되면 엄청난 고수가 될 줄 알았다. 어지간한 일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10년을 넘어 20년에 더 가까운 지금, 스스로 신규 시절에 비해 얼마나 발전했는지 말하고자 하면 참 곤혹스럽다.
교직에서 만난 엄청난 내공의 선배 교사들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런 선배 교사의 퇴임식을 볼 때면 그 세월에 무게감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다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여도 신규 교사와 동일한 일을 해야 하는 교직의 특성상 나이가 들수록 서글퍼지는 것도 사실이다. 고단함은 늘어나고 신체는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만날 교사로서의 삶을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