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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리 May 09. 2020

자연의 선물

나의 시작


내 인생의 황금기는 2005년 경 찾아왔다. 그때가 의미 있고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었거나 거대한 목표를 거두었기 때문은 아니다.
30여 년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숲의 자연이 둘러싼 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생애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혼자 사는 30평 아파트는 대궐이나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작은 방 창문 너머 멀찍이 용인 에버랜드가 보이고 거실 창문을 통해 울창한 숲이 내다보이는 '전망도 좋은' 아파트였다. 강남권으로 1시간 30~40분을 버스 타고 직장에 다녔다. 한적한 외지에서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태워야 수지가 맞을 버스는 인적이 드문 국도를 돌고 돌아 국내 최대의 번화가 강남으로 드나들었다.



지금이야 교통망, 학군, 상업시설 같은 삶의 '필요조건'들이 집을 선택하는 당연한(?) 요인이지만 철이 없었는지 그때는 복잡하고 공해 많은 서울을 무작정 뜨고 싶었고 최대한 자연에 근접한 집을 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들은 직장을 은퇴하고 나서 인생 후반부에 전원생활을 한다지만 나는 30대에 이미 체험했던 것이다. 10년 후 그 집을 팔면서 그동안 낸 이자를 감안하면 수천만 원 손해를 봤으니 '내게 살기 좋은 곳'이라고 '경제적으로도 나은 곳'은 아니었다. 대신 경제적으로 평가할 수 없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다.
그때는 혼자 살 때라 학원이나 학교, 대규모 상업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은행 일은 직장 근처에서 보면 되고 먹는 일은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면 됐다. 봄이면 산자락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쑥을 캐서 국 끓여 '특별식'도 먹었다. 그런데 내가 끓인 쑥국은 엄마가 집에서 해준 것과 달리 매우 썼다. 산에서 직접 캔 쑥이라 약이 돼서 그런 걸까? 쌀뜨물로 안 해서 그런 걸까? 나중에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생쑥을 끓인 사람이 어디 있냐며 쑥을 말려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재미'가 삶의 추억을 만드나 보다. 그때 당시에는 지금처럼 레시피가 풍족한 요리책이 없었다. '나 혼자 산다'가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집 바로 앞에 산을 자주 다녔다. 산을 오른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낮은 동네산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단체 활동으로 몇 시간씩 땀 흘려 오르며 정상에 깃발을 꼽고 후다닥 내려오는 산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상에 빨리 오르리라는 거대한 결심도 , 무언가 도전적으로 해보겠다는 거창한 구호와 목표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다니니 마음도 가볍고 몸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낮은 산이긴 하나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고 중간에 돌아가기도 했다. 아기자기한 여정 동안 충분히 시간을 즐기는데 구태여 산 정상에 오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거미가 집을 어떻게 짓는지, 개미가 어떻게 협심해서 땅속의 흙을 퍼내는지, 벌이 어떻게 꿀을 따는지, 꽃잎이 몇 개 인지, 왜 화려한 꽃일수록 향기는 진하지 않은지, 죽은 나무가 삶의 터전인 버섯은 어떻게 자라는지, 약수터 옆 바닥이 다 드러나 졸졸 흐르는 물속에 기다란 꽈배기처럼 생긴 투명 알은 누가 낳은 건지, 나무는 스스로 떨어뜨린 나뭇잎으로 뿌리 주위를 감싸서 수분 증발을 막아 겨울을 대비하는걸 어떻게 아는지, 청설모가 수십 미터 아찔한 높이의 나무들을 어떻게 추락하지 않고도 잘 타는지... 이렇게 물음표를 가지고 자연과 함께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금세 저물었다.



산은 정상에 빨리 오를 때보다 정상에 오르느라 지나쳤을 많은 자연의 손길들을 외면하지 않고 천천히 오를 때 정말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산과 같은 자연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인간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선사한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전나무 숲 향기였다. 어쩜 이렇게 향기가 좋을 수가 있을까! 소음과 매연이 가득한 도시생활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서울 중심으로부터 불과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이곳은 내게 지상낙원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잊히질 않는다. 처음 이사하고 그다음 날 아침에 숲 속의 새소리에 잠을 깨면서 일어날 줄이야. 정신은 어찌 그리 쾌청하고 머리가 가벼운지 기분이 새처럼 날아올랐다. 그 뒤론 익숙해져서인지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새들은 여전히 지저귀고 나무들은 여전히 숲을 지키고 있는데, 이처럼 뭔가에 익숙해지면 아무리 좋은 것도 무뎌진다는 무서움을 알았다.



숲을 계속 다니다 보면 가끔 통찰을 얻는 때가 있다. 전나무는' 피톤치드'라는 사람에게 면역력을 높여 주는 매우 유익한 '천연 약'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왜 전나무는 자신에게 어떤 이득도 주지 않는 인간에게 이렇게 몸에 좋은 피톤치드를 선물하는 걸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니 피톤치드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해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충 기피제를 분출할 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아! 원래의 목적과 달리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유익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해로울 수도 있겠구나! 이 원리를 확대해서 보면 어떤 사람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영향으로 나타나고 또 누군가에게는 나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관점의 이동'이라 명명했다. 이 자연의 깨달음이 계기가 되어 숲에서 얻은 통찰 하나하나를 기록해 두었다. 깨우친 자연의 순리와 더불어서 크고 작은 삶의 통찰을 엮어 비즈니스에 접목한 창의성 두뇌과학 책인 '아이디어큐레이션'이라는 생애 첫 책을 내는 '업적'도 남기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을 가까이하려는 사람들이다 보니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이 많았다. 쉽게 말을 걸고 이웃사촌으로 가깝게 지낼 만큼 거리감이 없었다. 이웃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자연까지 삶을 건강하게 받쳐주니 삶의 질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삶의 기준에 경제적 관점들이 크게 작용하다 보니 지금은 그 시절의 '준 시골' 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가슴은 그때를 기억하는지 진한 향수로 남아있다. 모르긴 해도 인생 후반부엔 다시 그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동시에 다른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도 인생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그리고 거기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른다면 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보다 충실한 삶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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