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처음 써본 시나리오, 완성도는 습작 수준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다니.
지금껏 글쓰기에 딱히 거부감도 불편함도 없이 살았던 나인데, 정말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학교 다닐 때 과제로 제출했던 한 장면 만들어보기, 다른 사람의 기획안에 첨언을 해보기, 이야기의 재료가 되는 시놉시스 정도는 끄적여 봤지만 첫 장면과 끝 장면을 온전히 구상해내고 기어이 지문과 대사로 완결지어 써본 건 살면서 이번이 처음이다.
어떤 공모전 소식을 접하게 됐고 (공모 마감까지는 딱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 왠지 이번에는 직접 써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게 계기였다.
꽤 오랫동안 영화에 관한 글을 써왔고, 영화를 평가하기도 했고, 심사하기도 했고, 심지어 영화의 관람등급을 매기는 일도 했던 나는 막연하게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품고 있었지,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엔 드디어 그것을 해냈다.
기. 첫 주의 고민
그래, 까짓것 공모전 응모 한 번 해보지, 뭐. 마음 먹은 건 마감까지 30일이 조금 넘게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시나리오라 하면 2시간 안팎의 분량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구조와 대사가 갖춰진 글이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한 달 안에 쓸 수 있을까? 의문은 들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그 고민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공모 기준을 보니까 분량은 한 달 내내 뭔가를 쓴다면 해볼 수 있겠지,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월간지와 주간지에서 오래 일했고, 아주 잠깐이지만 일간지에 실리는 기사나 리뷰, 인터뷰 등을 썼기 때문에 우선 써야 하는 글의 '분량'에 대해서는 불안감이 없었다. 원고지 매수로 일주일에 3-40매의 글을 뽑아내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분량만 자신있었다는 뜻이지, 글의 완성도까지는 뭐...
그동안 끄적였던 각종 아이디어를 모으는데 일주일의 시간을 썼다.
승. 둘째 주의 고민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문득 매일밤 달리기를 하면서 눈에 보였던 어떤 풍경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써보면 좋을 것 같아서 소재를 정하고 캐릭터와 상황, 거창하게는 세계관이라는 걸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일은 해야 하니까 다른 돈 받는 글도 쓰고 시사회에 가서 영화도 챙겨보고 하느라 일주일이 또 훌쩍 지나갔다.
전. 셋째 주의 고민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쓰려던 소재의 세계관 설정 구상에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너무 방대해져버려서 짧은 시간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배경은 그럴싸하게 고민해놨는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없었다. 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여기서? 이때부터 다시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블루레이들을 들여다봤다. 내가 평생 모아온 소중한 영화책들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또 일주일을 보내면 나는 정말로 공모전 마감을 맞출 수가 없겠다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의 키워드 요소를 뒤섞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간 계산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방송작가 할 때 1분 분량의 대본을 한 시간 걸려서 썼으니까, (이것도 정말 빨리 쓴 거다.) 어림잡아 100분의 시나리오를 쓴다고 하면... 100시간이 기본적으로 필요할테니까 (물론 말도 안되는 계산법이지)
오 도전해볼 수 있어! 할 수 있어! 자기최면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세계관과 등장인물 소개를 A4 10페이지 분량 정도되는 양으로 정리를 했다.
결. 넷째 주의 고민
공모 마감이 금요일인데 월요일까지만 해도 한 장면도 못 쓰고 있었다. 오프닝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데 하루를 썼다. 다른 영화 리뷰쓰고 비평할 때는 그렇게 첫 장면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가며 강조했는데 막상 내 이야기의 첫 장면을 뭘로 해야 하지?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청난 액션 장면으로 구상해야겠어! 이건 화요일 오전의 상황이다. 대체 액션 장면의 시나리오를, 지문과 대사로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야... 10씬 정도 쓰는데 하루가 걸렸다. 머릿 속으로 장면을 상상해보면 아니, 길어야 5분 정도되는 분량이 될까 말까인데 이거 5시간만에 썼어야 되는 거 아니야??
화요일 밤에 솔직히 포기해야겠다 싶어서 일단 접고 달리기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 정도 미친듯이 땀을 뺐는데 집에 돌아오는 순간, 갑자기 첫 장면으로 넣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미친듯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완성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이대로 3일 안에 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렇게 3일 내내 책상에 앉아서 밥 먹을 때 잠깐 빼고 쉬지 않고 썼다. 24시간 중에 28시간 정도는 노트북을 두르려댄 것 같다. 3일을 내리 그렇게 썼다. 그리고 마감을 6시간 앞두고 (또 돈 벌고 살아야 하니까) 이틀 밤샌 상태로 라디오 출연을 다녀왔다. 그때까지도 아직 결말을 구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마감 한시간을 남겨두고 엔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찌저찌 응모를 하고 난 이후에 내가 쓴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보니, 어이없게도 100분 정도의 분량에 턱없이 부족한 양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 전개, 구조, 캐릭터에 따른 대사, 다 좋은데 뼈대만 있고 아직 살이 안 붙어 있는 시나리오가 되어 있었다. 머릿 속으로 영화의 러닝타임을 상상해봤는데 이 정도면 60분 정도 분량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아쉽지만 3-4일 안에 하루 10시간 넘게 앉아서 뽑아낼 수 있는 분량의 최대치였던 것 같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글을 쓰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내가 만든 캐릭터의 대사를 코믹하게 만들어 넣을 때, 너무나 아름다운 로맨스가 펼쳐지는 상상을 하며 지문을 쓸 때, 끔찍하고 잔인한 상황 묘사와 급박한 전개를 위해서 신의 위치를 바꿔넣을 때, 이상한 쾌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올라왔다.
한 번의 경험 정도로 그치지 말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그것이 소설이 됐건 대본이 됐건 계속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파워 P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스케줄이었다. 아무 계획없이 설정만 던져 놓고서는 어떤 결말에 이를지 길찾기하듯 글을 써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다. 이제 다른 시나리오 글감을 구상해야겠다.
역시 뭔가 안 풀릴 땐 일단 뛰고 보는 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