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윤 Dec 08. 2022

우리는 어디서 쓰는가

사회부 기자 경과 나눈 대화록


퇴사하고 정리하고 싶었던 무의식들 중 하나는, 제게 글쓰기란 무엇이냐는 겁니다. 나는 어디서 쓰고, 왜 쓰고,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퇴사하고 본가에 갔는데, 아버지가 묻더라구요. 넌 그래서 어떤 글을 쓰며 살고 싶니. 사실 저는 글만 쓰려고 퇴사한 건 아니지만, 제 삶에서 글은 배경색으로 어디에나 꼼꼼히 발라져 있는 질 좋은 페인트 같은 걸 거니까. 그래서 사회부 기자 경과 함께, 글쓰기에 대해 대화하고,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나와 사회부 기자 '경'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키워드에 천착했습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쓰고, 집에서 쓰고, 카페에서 씁니다. 당신이 퇴근길 9호선에서 떠오른 생각을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였다면, 당신의 방이란 9호선 어느 칸일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넘쳐납니다. 그런데도 뭔가 석연치 않아요.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자기다운 방'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회사에서 회사같은 글을 쓰고, 카페에서는 카페같은 글만 쓰진 않나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은 사회부 기자로서 글을 씁니다. 오지윤은 작가이자 카피라이터이자 때로는 마케터로서 글을 씁니다. 둘의 글쓰기는 어떻게 다를까요. 둘의 문체는 어떻게 다르려나요. 직업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삶의 모양인데. 우리는 저마다의 방에서 어떤 모양을 끄적이고 있나요.



기사를 가장 많이 쓰는 공간은 단연코 카페다. <해리포터>라는 세기의 소설에 미쳐 있던 중학교 때 그 소설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읽어치웠고, 조앤 K 롤링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카페에서 하루종일 글을 썼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카페라는 공간이 대중화되기 전.



카페가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작업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낯설었는데. 하여튼 나는 이제 롤링처럼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카페에서 글 쓴 시간 만큼 나도 엇비슷하게 썼을지도 모르겠다. '정처 없는 직장인'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나의 매일 하루는 '여정'으로 요약된다. 어디에서 뭘 쓸지, 누구와 대화를 하게 될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대부분 거의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몹시 스트레스인 상황이겠지만, 극단적 P 성향을 지닌사람으로서는 아주 안성 맞춤인 직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기자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기자실을싸잡아서 별로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나는 기자실과 썩 잘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기자실 자체가 상반된 속성들을 욱여 넣은 공간처럼 느껴진다.기자가 '정처'를 두고 일한다는 생각은 역시 아무리생각해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누군가 '기자들 중에는 통계적으로 MBTI 중 P 유형이 많을 게 분명하다고 했는데, 과연 이 일에서 계획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고, 출근지도 예외 없다. 기자를 위한 정주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머쓱하다는 기분이다. 기자들끼리 모여 있기 때문에, 대충 통화 몇 마디만 해도 '쟤가 무슨 기사를 쓰는구나'고 알게 되거나 알릴 수 있다는 점도 영 내키지 않는다.



'방'이 아닌 곳에서 완성되는 글이 있다. 주로 '현장'이라는 표현되는 곳에서, 누군가의 첫 마디를 듣자마자 모든것이 명료해지면서 글의 방향이 순식간에 정렬되고, 그걸 깨달으면서 소름이 돋아버리는 때가 있다. 내 일의 거의 유일무이한 장점이라고 느끼는 지점이다. 언젠가 한 선생님께서 기자는 '연결 전문가'라고 정리해주신 적이있다. 현장과 정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말이다. 현장에는 보통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이 있고, 이걸 정치의 영역에서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정제된 언어로 번역해내는 연결이다. 비슷한 개념인데, 스스로를 '영매'쯤으로 여겨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제대로 신을 접하면 찌릿찌릿하겠지 가끔이지만 그런 소름의 순간이찾아오고, 이 경험은 매번 소중하다.




내가 있는 공간의 크기가 내 사유가 뻗어나갈 수 있는가능성의 크기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 날은 아주 골치 아픈 날이다. 좋은 공간을 찾아 헤매야 하는 날이다. CEO의 방은 언제나 전망이 좋은 꼭대기에 위치하잖아. 넓게 보는 자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내 방에 갇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필력'이 좋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결국 사유의 힘이 강한 사람이지, 단순히 '필력'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필력'을 갖추는 것은 좁은 방에서 가능하지만, 사유의 힘을 갖추려면 넓은 곳으로 나가야한다. 인간이 글을 쓸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은 그래봐야 카페다.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공용 공간'에 야박한지 글을 열심히 쓰고서야 깨달았다. 돈을 내지 않고 쓸 수 있는 책상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난 기어코 찾아낸 드넓은 카페에 앉아, 내 생각의 줄기가 내 머리를 뚫고 자라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상상을 한다. 이 공간을 ‘삼켜버리고’ 싶어. 넓은 공간이 나의 지적 식욕을 자극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나의 마초적인 지배욕은 다행히 엄한데서 발휘되지 않고 이런데서 왕성해진다.



부모와 함께 살 때, 나는 내가 외향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퇴근하면 무조건 카페에 갔다. 그런데 독립하고 보니, 집에 늘어져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나는 혼자있고 싶었던 거다.  



독립을 할 때, 나는 그럴싸한 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이제 글을 쓰고 영화도 만들 것이오. 이 곳은 작업실 같은 거랄까." 엄마, 아빠는 "그래라"하고 실없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집을 또 박차고 카페로 간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면목이 없다. 나는 사치스러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계속 돌아다니며 글을 써야 한다. 지금도 나는 집 앞 놀이터 그네를 타고 글쓰는 상상을 한다. 멋질 것이다. 집에서 쓰는 글과 그네에서 쓰는 글은 다를 것이다. 계속 달라지고 싶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글을 쓰지 않을거면, 글을 쓰는 이유가 없다. 시인 이수명의 창작관을 좋아한다. 나 역시, 모두가 이미 아는 '감정'을 '똑같은 언어'로 재생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2022년 여름 어느 카페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