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딩베시의 상인들
걸죽한 매연과 모래 바람 사이로 색색의 옷가지들이 거리를 누빈다. 이에 질세라 빼곡히 늘어 선 건물들도 총천연색 옷을 입었다. 무거운 몸을 늘어뜨린 전깃줄은 축 쳐진 뱃살을 닮았다. 게으른 전기는 예고없이 자리를 비우기 일수여서 상점들은 낮에도 어두컴컴하다.
줄지어 선 가게들 중 대부분은 간단한 스낵들과 핸드폰 유심칩을 팔고있다. 팔고 있는 물건이 똑같은데도 누구하나 돋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 없다. 간판조차 없어서 어떤 근거로 가게를 골라야할지 의문이다. 그들이 경쟁대신 모두의 느긋함을 택한 결과다. 손님이 어떤 가게를 택하느냐는 우연에나 맡기고 주인장들은 느릿느릿 부채질을 하며 동네사람들과 수다만 떤다.
슈퍼마켓 사장들이 느긋하게 수다를 떠는 사이 소위 '전문직'들은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이들의 모습 덕분에 다딩베시의 시내는 마을 공동체나 유토피아에 온 기분을 들게 한다. 모두 비슷한 넓이의 가게에서 비슷한 형편 속에 일하고 있는데 하는 일만큼은 천차만별. 직업 박람회장이 따로 없다. 노동 가치를 교환하며 옹기종기 살아가는 공동체 마을처럼 저마다의 고요하고 부지런한 노동이 이 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상업은 네팔의 주요 업종이 아니다. 인구의 약 80%가 농업에 종사하는 네팔에서 상인으로 산다는 건 아주 적은 인력으로 나머지 인구를 위한 값 싼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신발을 고치는 아저씨 옆집엔 옷을 수선하는 아가씨, 그리고 그 옆집엔 바세린과 화장품을 파는 아줌마, 그 앞 길 가엔 인도에서 넘어온 만물 장수. 그들의 노동력이 퍼즐처럼 차곡차곡 모여 다딩베시의 삶을 움직이고 있었다.
네팔에 사는 동안 나에겐 모든 네팔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비밀무기가 있었다. 바로 네팔어다. 한국어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배운 짧은 네팔어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귀금속 가게 아주머니도 나의 네팔어에 마음을 문을 번쩍 여셨고 말고.
나마스떼! (안녕하세요)
메로 남 풀마야~ (제 이름은 풀마야에요)
아마, 데레이 데레이 람로쳐! (어머님 너무 너무 예뻐요)
네팔 아주머니들도 한국 아주머니들과 똑같다. '어머니'라는 말에 대번 무너진다. 거기에 '예뻐요'까지 더하면 게임은 끝났다. 나는 네팔 이름까지 있으니 아주머니 입장에선 깜짝 놀랄 수밖에. 게다가 풀마야(한국어로 사랑스러운 꽃이란 의미)라고 소개할 때는 손으로 얼굴 밑에 꽃받침을 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연 성과는 몇백원 더 깎아서 산 반지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길가에서 마주치면 반가운 사람이 하나 더 느는 일이고 동시에 네팔을 떠날 때 작별 인사해야할 사람이 하나 더 느는 것이다. 끝내, 한국으로 돌아와 그리워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 둘, 나는 다딩베시의 상인들과 친구가 되어갔다. 어느 날은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나에게 "너가 풀마야구나! 잘 지내?" 라고 말하고 가더라. 하교하던 동네 초등학생들도 "풀마야!" 외치면서 뛰어와 나의 바지를 잡고 늘어진다. 외국의 작은 마을에서 유명인이 되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따뜻하고 흥분됐달까.
다딩베시에는 버스 정류장 표시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야할 곳을 알고 있다. 작은 창살문이 열리고 어린 남자가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곳. 이 곳에서 사람들은 버스 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린다. 네팔에는 아직 기호의 개념이 정착하지 못했다. 신호등도 없다. 전기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니 신호등을 설치할 수가 없다. 신호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이기에 간판과 표지판 역시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신호의 부재에 불안에 떨지 않는다. 서로 물어보면 되니까.
네팔이 딱 아빠 어릴적 한국 모습일거야. 가서 고생 좀 하구 와.
얼음처럼 찬 물, 하늘이 뻥 뚤린 푸세식 화장실, 수시로 나가는 전기,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따로 없는 흙길. 네팔에 간다는 89년생 딸이 무엇을 보게 될지 아빠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전기와 가스와 신호의 빈 자리를 네팔인들의 정겨움과 예상치 못한 재밌는 일들이 메우고 있었기에 나의 생활은 '마냥 고생할 것'이라던 아빠의 예상을 조금 빗겨가고 있었다. 푸세식 화장실 아래로 볼일을 보는 동안엔 벽을 타고 오르는 도마뱀을 관찰할 수 있었고 전기가 꺼지는 저녁엔 손전등으로 그림자 놀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마냥 낭만적인 건 아니었지. 훗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밤에도 찬란한 가로등 불빛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 처음 했던 따뜻한 샤워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손톱 밑에 쌓이고 쌓여 까맣게 뭉친 먼지들이 따뜻한 물에 씻겨나갈 때는, 이질적인 환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에게 네팔에서의 생활이 낭만적일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현실이었고 나에게는 경험이었다. 머물다가 떠나는 자는 절대 그들의 삶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차가운 물로 씻는 게 싫어서 엉엉 울던 고아원 막내의 기억은 뜨거운 물에도 씻겨나갈 줄을 몰랐다.
"5000루피 짜리 피부 130㎠"
최근 네팔 여성들이 피부를 팔아 돈을 번다는 기사를 읽었다. 대지진 이후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택한 밥벌이다. 성형붐이 일고 있는 인도의 도시 여성들에게 네팔 여성의 130㎠짜리 피부가 단 돈 5000루피에 팔려나간다. 5000루피는 한화로 약 88200원.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 가격이다. 네팔 여성들의 피부는 델리와 뭄바이 등 도시의 음경 확대와 가슴 확대 등의 목적으로 쓰인다고.
밥벌이는 성스러운 일이다. 이 땅에 던져진 우리가 제 스스로 먹고 살아갈 방법을 강구하는 아주 멋진 일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원치않는 밥벌이에 내몰린 다는 건 참혹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강하고 아름다운 네팔의 여성들이 부디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길. 골목 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땀흘려 지은 농삿거리를 팔던 엄마들의 건강한 초상이 더이상 지워지지 않기를.
강렬한 주름을 가진 얼굴이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있다. 근데 그가 입은 빨간 후드티에는 한글이 적혀있었다.
우연히...우연히...그러나 반드시.
언젠가 이 동네에 왔을 한국 봉사자나 여행객이 주고간 것일까. 아님 언젠가 한국에 외노자로 왔던 분이실까. 본인이 입은 후드티에 이렇게 비장한 한마디가 쓰여있다는 걸 알고나 계실까. 마침 비장한 그의 얼굴 덕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가 탄생했다.
네팔인들의 얼굴에 핀 주름을 사랑한다. 갈색빛 피부위에 펼쳐진 선들은 온화하기보다는 강렬하다. 거리의 상인들의 얼굴은 누구보다 강렬하고 심오한 인상을 준다. 무거운 짐을 오르 내리는 육체노동과 하루종일 계속되는 기다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대학교 때 배웠던 마르크스 철학에서 육체노동은 언제나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주체가 행하는 노동이 정직하게 결과물로 이어지기에 그 과정에선 어떠한 손실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회사원 친구들도 줄곧 술자리에서 매일 도장만 직업을 하고 싶다는 소리를 해대는 거다. 머리 쓰는 일은 좀처럼 정직하지 않으니까. 물론 내 머리 수준이 달려서 그런걸 수도 있지만.
사진 셔터를 누리며 시장길을 걷는데,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 우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떡해...
그 남자가 무서워서도 더러워서도 아니었다. 안타깝고 두려웠다. 온 몸에 뼈밖에 안 남은 남자는 흰 수염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길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흰 옷은 그의 신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까만피부가 흰옷의 성긴 짜임 사이로 반짝이고있었다. 네팔친구들은 그가 인도북부에서 넘어 온 걸인이라고 알려줬다. 한 손에 쥐어진 작은 가방엔 머리끈 봉지들이 걸려있었다. 그 가방 안엔 또다른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터. 그 잡동사니들을 팔아 끼니를 해결할 모양이다.
그는 구걸하지 않았다. 뼈밖에 안남은 몸을 이끌고라도 밥벌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