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와 소녀들

색색가지의 빨래들처럼, 공존의 미학.

by 오지윤




Your ordinary is my extraordinary
누군가의 일상이 내게 일탈이 되는 일





스페인 론다 절벽 위, 아주 촌스러운 여관의 꽃무늬 침대에 누워 팬티만 입고서는 이렇게 끄적였었다. 23살, 나름 여행을 좋아한다고 자부했던 내가 내렸던 여행의 정의이다. (이 때부터 이런 짓을 좋아했던 걸 보면, 지금 카피라이터가 되어있는 게 전혀 놀랍지가 않아) 나의 여행관은 어릴 때부터 명확했다. 누가 여행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고 하면 난 한결같이 답한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엄마가 들으면 모르는 사람 따라 갔다가 토막살인이라도 당해야 정신차리냐고 소리치시겠지만. 적어도 나는 진짜 여행을 해보려면 낯선 현지인들의 틈바구니에 나를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팔에서 나는 낯선 사람들의 일상 속에 그야말로 집어 던져진 시간을 보냈다. 굳이 낯선 사람과 어울리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태어나 처음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시간을 보내며 내가 23살에 내렸던 여행에 대한 정의가 참으로 명쾌했다고 생각했다. 론다의 여관으로 돌아가 23살의 나를 기특하다고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들의 일상이 내게 일탈이 되는 일은 도처에서 벌어졌다. 꼭 낯선 사람을 붙잡고 영어로 대화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길가의 빨래가 그렇다. 네팔 사람들은 빨래를 감추지 않는다. 하늘 위에, 길가 위에 수 많은 빨래 조각들이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 심지어 흙바닥 위에도 깨끗한 속옷이 수줍게 누워있었다. 온 몸의 힘을 빼고 늘어진 형형 색색의 빨래들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 늘어날대로 늘어난 할아버지의 티셔츠와 갓 숙녀과 된 딸이 입을 법한 귀여운 동물이 그려진 속옷보다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일상이 있을까.


삶이란 색색의 빨래 조각들을 하나하나 널어 놓는 일인거야.
나의 삶을 기어 올려 다른 사람의 삶 옆에 널어 놓고,
또 그 옆에 다른 색의 삶이 널리는 거지.
그게 빨래가 가진 다양성의 미학이야!


늘어선 빨래들을 보며 내가 동주에게 말했다. 규칙 없이 늘어선 서로 다른 색들. 바람과 물기가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모양들. 빨래의 미학은 여기서 온다. 언뜻 보면 처량하고 힘 없어 보이는 조각들이 모여 알록달록한 모자이크를 만들고 그 모자이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힘껏 지지하며 오늘도 여기 저기에 늘어져 있다. 그래서 빨래들을 한 참 쳐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참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만족감이 든다. 이런 이유에서, 길가의 빨래들은 어쩌면 여행자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가장 속 깊은 일탈일지 모른다. 낯선 이들의 빨래와 마주선 순간이 바로 공존의 시작이다.



현지인들의 모습만 우리에게 일탈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들에겐 작은 일탈이 된다. 예를 들어 슬리퍼를 끌고 산길을 뛰어오르는 그들에게 발목 토시부터 등산화까지 갖추어 신고 나타난 우리의 모습은 꽤나 재밌는 구경거리다. 여행이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 새로움이 되고 우리에겐 그들의 일상이 새로움이 되는, 이방인과 현지인이 만들어내는 가장 공평한 거래일지도 모른다.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산길에는 분홍색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곳에는 줄곧 네 명의 소녀들이 앉아있었다. 그 소녀들은 누가봐도 두 쌍의 자매들이었다. 형광 분홍색 스키니진과 청바지를 입은 왼쪽의 소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 반면 오른쪽 자매는 전통의상을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사진이 참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가운데 서있는 새끼 흑염소였다. 화려한 스키니진으로 대표되는 네팔의 요즘 스타일과 전통의상으로표되는 네팔의 고유 스타일 가운데 우뚝 서 구분점의 역할을 수행해 내고 있으니.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듯한 표정까지 너무나 기특하지 않은가.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나는 네팔의 미래와 과거(아니 점이지대로서의 현재라고 해야할까),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본다. 해발 3000M의 산골 마을에서 이들은 조용하지만 격렬하게 공존하고 있다.


곧 흑염소도 한 발짝 한 발짝 앵글을 벗어나고, 우리와 소녀들 사이에서 카메라도 사라졌다. 그제서야, 꽤나 냉소적인 표정을 짓던 핑크 스키니진 소녀는 긴장이 풀린듯 활짝 웃어보였다. 나는 네팔의 길거리에 널려있는 서로 다른 모양의 빨래들을 또 한 번 떠올렸다. 요즘 유행하는 옷을 입은 네팔 자매의 삶 옆에 전통의상을 고수하는 자매의 삶이 널려있는 곳. 그 옆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아주 조심스럽게 널어놓았다. 젖은 물기를 빼기 위해 옷을 툭툭 털듯, 카메라도 내려놓고 경계심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의 삶을 놓았다. 우리는 색색의 빨래들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바라본다.

이 사진 한장이 그 소녀들의 하루에도 작은 일탈이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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