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할 수 없던 질문
학생들의 받아쓰기 평균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자음과 모음에 대해 더이상 반복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의외로 낙오자는 드물었다. 첫날 한글 교실에 나왔던 학생들의 대부분이 계속해서 출석했고 소문을 듣고 중간부터 찾아오는 학생도 있었다.
한국어를 잘하게 되어도 한국에 갈 돈이 없다던 나브라즈도 묵묵히 같은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 무렵 학생들의 눈빛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눈빛의 정체란 욕심이었다. 아이들 마음에는 어쩌면 정말 한국으로 갈 수 있을거라는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나 역시 조금이라도 더 잘 가르치고 싶었다. 수업 중에 소란을 피는 학생에겐 소리도 지르게 되었고 때때로 모진 말도 했다.
나의 모진말 레파토리는 한 가지였다.
한국어 왜 공부해? 한국와서 일해서 돈 벌어야하잖아 우리.
다들 절박해서 이 자리에 온 거 아니었어? 지금 이 수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
한국말로 하면 더 모질게 느껴질 이 말들은, 다행히 영어라는 외국어를 통해 조금은 덜 감정적으로 발화되었다.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선생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랬는지 아님 내 생각에 진짜 공감해줬던 건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들 중에 한국어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희망을 주입했다. 작고 연약한 풍선이라도 희망을 넣고 또 넣으면 언젠간 하늘 위로 떠오르겠지. 호기심 많은 새와 부딪힐 위기를 넘고, 천둥 번개의 공격을 피해가다보면, 아주 아주 천천히 국경을 넘을거야. 그런 욕심이었다.
수업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준비해갔다. 원래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각자 집에 다녀오거나 축구를 했지만, 막바지가 되자 모두 마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날은 내가 모진말 레파토리를 퍼부었던 날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나는 한국의 매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던졌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외국인들 사이의 어색함을 돌파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라는 걸 알고있었다. 마당의 공기는 가벼워졌고 아이들의 목소리도 하나 둘 커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침묵이 나타났다. 우등생 레건이 던진 질문때문이었다.
What kind of job are we going to have in Korea? (우린 한국에 가면 어떤 일을 하게 되요?)
아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레건이 스스로 답변을 던졌다.
We will do 3D work, right? (3D 업종을 하게 되겠죠?)
아 어떡하지.
순간 고등학교 때 2학년 주임 선생님이 떠올랐다. "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라는 말을 자주하던 선생님이었다. 감기가 걸려 담요를 뒤집어 쓰고 돌아다니는 나를 불러 세워서 "감기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정신력으로 이겨내면 돼" 라는 말을 하던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의 어떤 난처한 상황에도 결국엔 "너에게 달렸어"가 답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무책임한 아무말이 없다. 문제가 감기든지 대한민국 교육의 구조적 문제이든지 그 어떤 문제에도 해답은 너의 노력과 정신력이라니. 되짚어보면 상황의 본질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임기응변적 답변일 뿐이었고 당사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말로는 답을 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그 상황으로부터 멀리멀리 고개를 돌려버리는 위선적인 외면이었다.
그건 너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근데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올 줄이야. 그것도 이런 상황에. 부모님의 모습을 싫어하면서 자란 아이가 결국 커서 그 부모님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결국 혐오하던 선생님의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임기응변"과 "책임회피"를 위해서 말이다. 뒤이어 나는 한국어를 정말 잘 하게 되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다양해질 수 있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네팔에 가기 전 가을, 초등학교 동창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내 인생, 남을 위해 살아보자는 결심에 떠난 곳이 네팔이었다. 그런데 결국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아이들을 3D 직업의 세계로 이끄는 일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뻔뻔하게 한국으로 오라고, 장미빛 미래만 있을것처럼 호통치고 설득하며 희망을 주입했던건가. 결국 "나는 이들을 돕고 있다는" 자위를 하며 만족하고 있던 건 아닌가. 그 밤, 나의 자기 비판 능력치는 히말라야를 넘을 기세로 높아지고 있었다.
며칠 후 유성이 내렸다. 방에서 터벅터벅 나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리 학생들의 이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적어도 네팔사람이란 이유로 상처받을 일은 없어야해.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빌어먹을 세상에게 상처받아서는 안돼. 쏟아지는 유성과 네팔을 지키는 수천의 신들을 향해 엉엉 울며 기도했다.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기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년 뒤 2017년 늦봄, 대한민국에서는 두 명의 네팔 젊은이가 사망했다. 청소 기계가 고장났다는 이유로 사장은 마스크하나 쥐어주지 않고 네팔 젊은이 2명을 분뇨처리시설 밑으로 내려보냈다. 일반 작업장 적정수치를 훌쩍 넘은 황화수소에 두 젊은이는 그대로 질식사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녹음이 푸르른 7월, 이번엔 네팔 젊은이 한명이 공장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오늘 세상과 작별인사를 합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도 받았고,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됐습니다. 제 계좌에 320만원이 있습니다. 이 돈은 제 아내와 여동생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한 서린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이제 명확해졌다. 나는 어쩌면 실제로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황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저 젊은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똥통에 빠져죽을 수도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을만큼, 대한민국에서의 노동은 힘드리란 것을. 레건이 나에게 물었듯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가난한 나라를 바꾸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 그리고 그들처럼 되기 위해 또 다른 젊은이들이 오늘도 네팔 어딘가에서 욕심어린 눈빛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겠지.
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결국 단 한명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