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의 기록
이별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친할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내게 잿가루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화장터 직원의 빗자루가 일으키는 바람에 잿가루 중 일부는 날아가버렸는데, 그게 할아버지 몸의 어디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이별에 굉장한 면역이 되었다고 믿으며 살았다. 다른 학교로 전학가버린 학교 친구도 계약직 기간이 만료되어 학교를 떠나는 젊은 선생님도 담담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네팔에 와서 나의 믿음은 무너져버렸다. 이별은 하고 또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구나.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이별이란 어딘가 미흡하고 어딘가 미숙하다. 그럼에도 또 최선을 다해 대비한다. 이별이라는 의식을 완벽히 해야 뒤탈이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몰아칠 울음을 적정량으로 배분해 한달 동안 틈틈히 울어뒀다. 학생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한국에서 기념품도 사다 놓았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동료들과 새벽까지 편지도 썼다.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 한복을 입혀봤는데 꽤 잘 어울렸다. 산이, 민호, 민준, 바다... 한국어로 지어준 이름도 잊지 않고 써 넣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영어와 한글로 썼는데 한글 편지를 읽은 친구가 한 명이라도 될런지 모르겠다.
한국어 꼭 열심히 공부해서 언젠가 이 편지를 읽어주세요
암튼 이렇게나 열심히 대비한 이별이었다. 이별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휘몰아칠 장마에 대비하듯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초등학교 6학년 떠나가는 할아버지 앞에서 주저앉았던 그 모습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날 더욱 철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뜨겁게 배우고
뜨겁게 서로를 알아갔으니
울어도 좋았다
마지막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눈물을 후두둑 떨구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어, 이상하다. 그 눈물이 끔찍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기쁘기도 고맙기도 했다. 헤어짐의 눈물은 우리의 관계가 꽤나 뜨거웠다는 단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울지말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뜨겁게 배우고 뜨겁게 서로를 알아갔으니 울어도 좋았다. 우리에겐 울 자격이 있었다. 나의 이별 대비는 역시 이렇게 무용한 것이 되어버렸다. 운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서로를 아꼈음에 울 수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나의 이별관은 네팔에서 수없이 번복되고 있었다.
귀여운 고등학생이었던 슈레스는 베이지색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그 아이에게 이 순간이란 일종의 의식이었다. 십여년 살아 온 동안 가장 특별했던 시간과 만남에 대한 이별에 슈레스는 예의를 갖추고 싶었을 거다. 우리가 그의 삶에서 만난 첫번째 외국인 친구이고 그래서 너무 특별하다고 슈레스는 자주 말해왔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는 한국 음식과 함께 이별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배웠던 네팔 민요 < Resam Phiriri> 를 크게 틀어 놓고 우리는 다함께 춤을 췄다. 레쌈 삐리리~ 레쌈삐리리~ 우레라 자우끼 다라마 번쟝 레쌈삐리리~ 나는 이 노래를 악착같이 외웠던 날이 떠올랐다. 소풍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학생들은 마치 복수를 하듯이 나에게 이 노래를 호되게 가르쳐댔다.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밀착마크를 하며 "REPEAT AFTER ME"를 외쳐대더라. 난 이 때다 싶었다. 애들아 암기는 이렇게 하는거야. 내가 한국인의 암기실력을 보여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를 배울 때는 순간적인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걸 몸소 솔선수범해야겠다는 의지가 번뜩였다. 이를 악물고 노래를 외워냈다. 신기해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덤으로 '여자의 보조개'에 관한 노래를 알려줬는데 그 노래 가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보조개 어때? 이쁘지? 하는 내용의 트로트같은 노래였는데 무지 신났던 느낌만 남아있다. 역시 한국인의 주입식 암기란 수명이 짧디 짧다.
목면화가 피었네
너는 언제 피는 꽃이니?
낙화의 모습이 마치 흰 새가 날갯짓 하는 것 같구나
백색의 새가 계속 날고 있네.
너는 매우 피곤하겠구나
잠시 날갯짓을 멈추고 쉬고 싶진 않아?
아니면 계속 아주 멀고 먼 곳으로 계속 날아가고 싶은거야?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레썸삐리리의 번역을 찾아보니 이러했다. '낙화'와 '피곤한 백색의 새'라니. 고산지대에서 바람을 맞고 사는 네팔인들의 거친 피부가 그려진다. 자신의 키보다 큰 뗄감 무더기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르던 할아버지들의 날갯짓이 생각났다. 노래 가사 사이 사이에서 거리를 배회하던 늙은 들개들의 낙화와 백내장을 치료하지 못한 노인들의 백색 눈을 마주쳤다. 나 원 참, 내가 이런 가사에 그렇게 신나게 춤을 췄다니. 슬프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우리의 이별파티와는 묘하게 어울렸는지도.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여튼 그렇게 레썸삐리리에 맞춰 우리는 최후의 몸짓을 신나게 즐겼다. 내가 한 달 동안 지켜 본 네팔의 춤이란 주로 팔과 손목을 이용했다. 손가락들로 최대한 아름다운 선을 만들고 리듬에 맞춰 손목을 돌린다. 발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인도춤과도 비슷한데 훨씬 단아하고 섬세했다. 우리 나라의 전통 춤도 주로 팔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동작이 많은 걸 보면 이게 바로 인류의 본능적인 몸짓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덕분에 무리없이 나도 네팔스러운 춤을 습득하게 되었다. 춤도 추고 학생들 한 명 한 명과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여학생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럭쓰미가 울음이 터진 모양이다. 엉엉 우는 럭쓰미는 뛰어와서 갑자기 나를 잡아끌고 교실로 들어갔다.
럭쓰미는 나를 꼭 껴안고 엉엉 울었다. 아무말도 없이 그렇게 울었다. 그러다 애써 감정을 누르며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 말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 오길 정말 잘했구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비하하던 지난 계절의 내가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내가 뭉게뭉게 피어났던 내 인생의 명장면. 학생들이 내게 지어준 풀마야라는 네팔 이름처럼 새로운 나를 꽃 피워준 한 마디가 바로 그 순간, 럭쓰미의 입에서 나왔다.
You are the best teacher ever. I mean not only past, in my whole life.
당신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선생님입니다. 지금까지 중에서가 아니라, 제 인생 통 틀어서요.
'지금까지' 선생님 중 최고라는 건 열린 결말의 표현이다. 지금까지는 너가 최고지만 언제든 최고의 자리는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럭쓰미는 내가 그렇게 생각할까봐 굳이 한 마디를 덧 붙였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은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일거에요라고 마음의 결을 섬세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던거다. 그 첨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새빨개진 눈과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오해의 가능성을 차단시킨 럭쓰미.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완벽한 감사의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일이다. 네팔 억양이 그대로 담긴 럭쓰미의 뚝딱거리는 서툰 영어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린다.
남학생들은 우리를 피자집으로 불러서 서프라이즈 선물을 선사했다. 네팔 지도의 특이한 모양때문에 포장된 상태에서도 선물이 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나 정체는 나무에 새겨진 네팔지도였다. 종이 지도가 아니라 나무 지도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네팔스러움에 나는 또 감격해버렸다. 포장지 위에는 디팍이 써놓은 한글 메세지가 적혀있었다. 평소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던 디팍은 구글 번역기에 You are welcome을 넣어 봤나 보다. 상대에게 주는 선물에 "별 말씀을요"라니. 그마저도 철자가 틀려서 디팍은 두 손가락으로 틀린 부분을 계속 가리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인 우리 앞에서 부끄럽긴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가 정말 다딩베시를 떠나는 날 럭쓰미가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주라(네팔식 팔찌), 머리끈, 발가락지 등등 많은 선물을 줬던 그녀가 또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이별 선물을 뭘까 내심 기대가 되었다. 그녀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을 때, 그 안에는 유심칩이 있었다.
you are going to Himalaya? It is really high. you have to contact us in humalaya.
너 히말라야 간다며? 거기 정말 높아. 너 히말라야 가서도 우리한테 연락해야 해.
나보다 4살 어린 럭쓰미가 엄마처럼 느껴졌다. 부리부리하게 뜬 럭쓰미의 큰 눈엔 더 이상 눈물이 고여있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또 만날 거라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이제 울 필요가 없었다. 또 만날테니까. 그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 겪어본 "완벽한" 이별이었다.
*다음 글부터는 네팔 여행기를 집중적으로 써내려갑니다.
여행 도중 다시 학생들을 만나러 다딩베시에 들리기도 하지만,
그동안 올리지 못했던 우리 학생들의 어여쁜 사진들을 이 틈에 기록해두기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