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다 사람

신보다 위대한 히말라야의 사람들

by 오지윤



포카라에 도착했다. 그 천국같은 마을에서 겨우 하루만 쉬고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왜 하루밖에 쉬지 않았느냐고? 용감하거나 절박해서는 아니다. 무지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하이킹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충분한 휴식도 없이 산에 뛰어 든 거였다. 한국어 선생님 기간이 끝나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여정인지라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두꺼운 등산복, 눈 올 때를 대비한 아이젠, 방수 바지를 준비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물론 나의 무지함에 대해 해명할 한 마디는 준비됐다. "하이킹이라길래 정말 하이킹인 줄 알았지!"


그렇게 얇은 점퍼를 단촐하게 입고, 두 달치 짐을 어마어마하게 매고서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최악의 언발란스 컨디션. 이런 컨디션으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전하다니, 신이 머무는 히말라야 앞에서 이렇게 경솔한 하이커들은 우리가 유일할 거다. 하긴 내 앞에서 지치지 않는 속도로 갈어갔던 포터(Porter)를 생각하면 나의 점퍼와 등산화조차 사치긴 하지만.


포터(Porter)란 등정가나 하이커들이 산을 오를 때 옆에서 짐을 나누고 가이드를 해주는 현지인을 말한다. 처음에 나는 포터에게 내 짐을 나누지 않았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어서, 내가 그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두 달치 배낭을 보고 그가 '재수 없는 손님이군'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포터는 원래 엄홍길 대장처럼 진짜 '등정가'들이 거대한 목표를 달성할 때 함께 짐을 나눠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같은 무지랭이가 굳이 포터가 필요한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들기도 했다.


초입에서는 허밍이 절로 나왔다. 폰에 저장되어있던 '바람이 불어 오는 길'을 틀고 산을 오르니 흙바람에서 고소한 맛이 났다. 그런데 불과 10분이 지나고, 나는 뒤쳐지기 시작했다. 두 달치 옷과 네팔 학생들이 준 선물들이 들어 있는 배낭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일본 공포 영화에 나오는 시퍼런 귀신 아기가 내 발목을 잡고 안 놔주는 느낌.


나는 군 말 없이 제일 큰 배낭 하나를 포터에게 넘기고 말았다. 내가 내 짐을 매겠다고 괜한 떼를 쓰다가는 산 봉오리 하나도 못 넘기고 해가 질 지경이었다. 나는 순순히 항복했다. 우리의 큰 짐을 두개 짊어지자 포터의 등이 기억자로 굽었다. 등산화도 아니고 허름한 흰 운동화에 허름한 카라티를 입고서 포터는 아무렇지 않게 속도를 유지했다.



4시간 쯤 걸었을 때, 마을을 만났다. 산을 계단식으로 경작해놓은 마을에는 학교도 있고 운동장도 있었다. 아니 이런데도 사람이 산다고? 내가 하는 '등산'이라는 행위에 사람들의 '거주지'가 등장할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한 번은 낭떠러지 같은 길을 걸어가는데 오른쪽 절벽으로 올라온 나무에 아저씨 한 분이 매달려있었다. 아저씨는 아주 안정적으로 나무 꼭대기에서 가지 치기를 하고 계셨다. 나무의 뿌리는 저 밑에 있는데, 아저씨의 눈 높이는 딱 나와 맞았다. 인간의 생존력에 대한 경외감까지 드는 장면이었다. 걸을수록 숨이 차는 이곳에서도 사람은 사는구나. 심지어 동물과 식물을 가꾸며 산다. 대단하다. 대단해. 마을에 있는 소들도 사람들도 멀뚱 멀뚱 참 하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또 심심해 보이지는 않는다. 땅에 딱붙어서 온갖 상가를 쏘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지하 상가까지 후비고 다니는 나를 돌아보면 저들은 참 이상하다. 이상해.


마을이 사라지고 황무지같은 산을 걷다보면 또 다른 마을이 나왔다. 이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 머리 속에 쌓이고 또 쌓였다. 그런 질문을 하던 중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학교에서 바로 학원으로 가야하는 한국의 아이들과는 참 다른 모습. 이곳 아이들에겐 바쁜 일이 없다. 그래서인지 계속 나만 좇아온다. "내 이름은 풀마야입니다." 잘 써먹는 네팔어는 여기서도 먹히고. 아이들은 한 참 나를 따라오다가, 흩어졌다. 애들아, 언젠가 너네도 우리 나라 산에 놀러왔으면 좋겠다. 우리 나라 산에 신이 사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에는 많은 산들이 있어. 아이들의 삶이나 미래에 대한 경솔한 예상을 억누르며,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네팔 사람들은 땅을 가리지 않는다. 네팔 사람들은 산을 사랑한다. 수많은 신의 거처가 있다는 히말라야와 가까이 살고 싶어서 일까. 사실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또 신 앞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생필품을 사러 머나먼 길을 나갔다 결국 또 산으로 돌아온다.


산이 네팔을 네팔답게 하고, 산이 곧 네팔의 집이다. 땅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너그러움과 용기에 언젠가 세상의 모든 신들이 손을 들어주기를. 또 한 번 함부로 연민의 감정을 느끼려던 찰나, 저 앞에서 인상 쓰고 나를 쳐다보는 포터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이런 사색에 빠질 틈이 없다. 부지런히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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