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브랜딩] 브랜디드 콘텐츠와 광고의 차이
얼마전에 델마와 루이스를 처음 봤다. 너무 유명하다 보니, 오히려 보기가 꺼려졌던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나는 오열하고 있었다. 아, 이런게 영생을 누리는 고전의 힘인가.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내심 영생을 꿈꾼다. 혹시나, 행여나 대박이 나면 어떡하지. 조회수가 터져서 몇 십년 후에도 회자 될지도. 하는 상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곤 한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마도) 없다.
텔레비젼이 매체의 대왕이던 시절에는 TV광고도 그 인기를 함께 누렸다 .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던가 “저 이제 내려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같은 카피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거나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생리대 광고에서 처음 쓰였던 “마법”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생리를 지칭하는 은어로 꽤 오랬동안 쓰였다. 몇 년 전 공효진과 공유가 등장한 SSG 캠페인의 비주얼 코드가 패션지에서도 패러디 되는 걸 보고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광고가 다른 미디어를 패러디하는 건 익숙하지만 광고를 누군가가 패러디하는 건 낯설고 반가운 일이 됐다.
광고는 숙명적으로 짧은 수명을 안고 태어난다. 그 시대의 문화와 유행을 반영해야 하다보니 시대가 바뀌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광고의 목표는 어쨌든 세일즈. 마냥 좋은 소리만 할 수는 없고 ‘은근히 팔기’는 세상 모든 브랜드의 어려운 과제다. 너무 광고같이 만들면 광고주들이 “소비자들이 외면하지 않겠어요?” “자연스러운 바이럴이 일어나게 해주세요”라고 할 것이 뻔하다.(내가 겪은 광고주가 했던 말, 내가 광고주로서 했던 말이다. 더 좋은 광고주도 많다) 그래서 감각적이고 재밌게 만들면 “저희가 예술하려고(혹은 재밌는 거 하려고) 돈 쓰는 건 아니거든요”라고 할 것이다.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영업하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내고 도망가고 재밌으면 웃고 넘어가기 쉽다.
그래서 등장한 말이 브랜디드 콘텐츠(Branded contents)와 콘텐츠 마케팅(Contents Marketing)이다. 드디어 광고쟁이와 마케터들도 콘텐츠라는 말을 쓸 수 있게되었다. 노골적인 세일즈 영상을 만들거나 정보과잉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은(“나도 애플처럼 광고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뜻있는 광고쟁이들은 이제 서서히 콘텐츠 기획자라고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사실은 내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광고와 브랜디드 콘텐츠를 어떻게 구분해야할지 몰라서 존경하는 선배님께 질문을 했다.
- 광고와 브랜디드 콘텐츠는 뭐가 다른 겁니까?
- 음. 바이러스에 비유해보겠네. 광고가 치사율이 높지만 감염율이 낮은 거라면, 콘텐츠는 치사율은 낮지만 감염율은 높은 거겠지.
선배님의 말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알다시피, 천재들은 뻔한 말을 멋있게 표현한다. 선배가 한 말도 뻔해보이지만 꽤 소름돋았다. 확실히 감염율과 치사율은 마케팅 콘텐츠가 고려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2가지 요소다. 하지만 위 표를 토대로, ‘광고말고 콘텐츠를 해야한다’라고 판단할 필요는 없다. 좋은 제품은 ‘광고'로서의 목표에 집중해도 바이럴이 된다.
인스타그램에 흔히 등장하는 ‘실험’ 영상들이 그거다. 워터 푸르프 마스카라를 증명하기 위해 폭포에 들어간다든지, 세정제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모낭충님들을 모델로 섭외한다든지. ‘기능 설명’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들이다.
하지만 ‘상품’을 넘어 ‘브랜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콘텐츠’로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광고는 한 사람 한사람의 주머니를 열어야 하지만 콘텐츠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도 일단 성공이다. 그래서 콘텐츠는 더 보편적인 속성을 지녀야 한다. 10년 넘게 대중이 좋아하는 카피 1위를 찍는 Nike의 Just Do It 광고 영상에는 특정한 제품을 팔겠다는 노력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그래! 포기하지 말고 영어 공부해야지" 라든가 “그래 이직에 도전하겠어!”라든가 운동과는 전혀 관련 없는 쌩뚱 맞은 결론을 낳을지도 모른다.
이 영상을 본다고 나이키의 구매가 일어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이키는 주구장창 이 메시지를 외친다. 보편적인 메시지의 지속가능성과 공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요즘 마케팅 장표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 소비자를 브랜드의 Fan으로 만들자는 문구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받는 브랜드들은 Fan이 되어달라고 말하기 전에 소비자들의 Fan이 되기를 자처한다. 구매해달라고 말하지 않고, ‘네 인생의 작은 변화가 일어나길 응원해’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나이키나 애플같은 퀄리티의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내게도 그와 흡사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왔다. TV 광고를 위주로 만들던 내가, 브랜디드 콘텐츠를 기획하게 되면서 계속 되뇌인 말이 있다. “이건 여러번 플레이할만한 영상이어야 한다.” 미천한 매체비 때문에 파급력은 어차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한 번 본 사람은 또 보게 되는 영상이었으면 했다.
회사 내 어르신들과 예산 담당 부서 등의 수많은 눈초리를 느끼면서도 ‘콘텐츠’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수하려고 애썼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뿌듯함과 동시에 답답함이 느껴진다. 브랜드가 전사 방향을 ‘콘텐츠 마케팅'으로 잡지 않는 한, 그 안에서 개개인 몇명이 고군분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사랑스러운 브랜드들은 전사의 구성원이 ‘브랜디드 콘텐츠’에 대한 어느정도의 공감대를 분명히 이루고 있을 것이다. 브랜드가 발행하는 모든 콘텐츠는 헨젤과 그레텔이 흘리는 빵가루와 비슷한 거다. 소비자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빵을 주우며 브랜드를 따라온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어떤 풍경의 길을 만들어갈 것인가
이 두가지를 전사 구성원이 다함께 인지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리더가 좋은 리더다. 디자이너 출신 CEO가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8개월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태평하기를’이라는 뮤직비디오를 런칭했다. '볼류메트릭 스튜디오'를 활용한 아이디어를 내라는 지시를 받고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나는 ‘무형문화재’를 유형의 AR 콘텐츠로 기록해서 최종적으로는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로드맵을 구상했다. 우리가 8개월 동안 넘은 산들은 다음과 같다.
어렵게 어렵게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태평무' 보유자 선생님을 섭외해서 AR로 만든 후,
어렵게 어렵게 리아킴을 섭외하고
어렵게 어렵게 한국 장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어렵게 어렵게 경복궁을 섭외해서
어렵게 어렵게 3D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14LCxgCY&t=31s
태평무 무형문화재 선생님께서 “고맙습니다"라는 전화를 주셨던 순간도 참 뿌듯했지만 정말 신기한 일은 3개월 후에 일어났다. 영상 광고의 수명은 늘 1-3 개월 정도다. 매체비를 돌리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며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면 영상 광고는 하얀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태평무AR은 정말이지 '콘텐츠'였던 것이다. (감동)
3월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들불 축제 유튜브 생중계에 태평무AR이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주도 샛별오름을 무대로 태평무AR이 세상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태평무AR은 스스로의 힘으로 밥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광고 영상 역시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 아카이브 되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된 시간이 지나면 휘발해 버린다. 그런데 콘텐츠는 계속 살아남아 어딘가에 섭외되는구나. 우리의 태평무AR은 또 다른 전시에도 섭외가 예정되어 계신데 아이돌을 키워낸 기획자의 마음이 이런거구나 싶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인생,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소비’와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도 ‘예술’을 꿈꾼다. 이야기는 모두 사람들 사이에 영원히 살아남고 싶은 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초판만 내고 끝나고싶어하는 책이 없듯이 영상도 무형의 콘텐츠도 모두들 마찬가지다. 콘텐츠를 만들다 못해, 스스로 콘텐츠가 되어버린 역사적인 브랜드들을 사랑한다. 오래 오래 사랑받기 위해 당신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 것인가.
2021. 0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