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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Oct 08. 2021

설명할 수 있는

고유한 우리가 사는 고유한 우리의 집


Berlin 믹키의 아파트 복도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습니다. 본가가 있는 골목에는 오래된 주택과 빌라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골목의 첫번째 집은 초록색 대문 집이에요. 집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자주 들렸던 탓에, 이 집 앞을 지날 때는 괜시리 긴장이 됩니다. 





초록색 대문 맞은 편에는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 있는데요. 이상하게도 이 집 주차장은 항상 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잘못 건드리면 쏟아질 것같은 기계들이 쌓여 있어요. 운 좋으면 주인 아저씨가 보라빛 형광등을 켜고 작업하는 뒷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저씨는 어깨까지 오는 흰머리를 곱게 내려묶고 작업을 하시는데, 무엇을 만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옆 주택은 과한 문양을 새긴 금색 대문을 달고 있습니다. 봄이되면 개나리가 쏟아지는 담벼락에는 줄곧 하얀 진돗개가 얼굴만 내밀고 있었는데, 오늘은 나오지 않네요.






태어나서 30년 걸어온 골목인데, 이상하게 새삼스러웠습니다. 단순한 향수는 아니었어요. 대문의 색깔, 집을 지은 소재,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식물, 커다랗게 박혀있는  ‘OO맨션’ 장식. 그래봤자 뻔한 것들인데도 꽤나 다채로운 것들. 그들에게는 ‘설명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고유한 것들이 줄지어 있는 게 왜이리 낯설었을까요.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고유성을 파악해야합니다.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오직 그 대상으로만 귀결될 수 있는 것들이요. 제게 이 골목은 고유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눈에 담을 거리가 많아서 핸드폰을 보지 않게 되는 풍경.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거리는 넘버링에 세계입니다. 번지수, 몇동, 몇층, 몇호로 모든 게 해결되는 넘버링의 세계에는 관찰과 묘사가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회색문을 그리고 회색 문에는 금색 숫자가 써있겠죠. 넘버링은 ‘설명’을 무력화시키는 ‘지칭’의 영역이에요. 숫자로 하면 한마디로 되는데 '설명'은 비효율일 수 밖에 없습니다.






3년 전 독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베를리너 ‘미키’의 집에 묵었습니다. 미키는 허름한 다세대 건물에 살았어요. 어떤 집은 초인종 대신 타자기를 붙여 놓았고(물론 이분은 굉장히 특이한 분) 어떤 집은 문 앞에 식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서로 다른 집들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산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곳에서는 손에 만져지고 발에 밟혔습니다. 이 건물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좀더 포용력있는 사람이 되는,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달까요. 3층 타자기 초인종 집의 사연과, 5층 식물원의 사연을 상상해보는 동안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요즘 어린이들이 빌라에 사는 친구를 ‘빌라거지’라고 부른대. 






며칠 전에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에서 나온 말은 아닐거에요. '요즘 애들'이라며 아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집이란 뭘까요. 100명의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은 100개의 고유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와 아파트가 아닌 집, 세상에 단 2개의 집만 있다고 가르친 사람은 따로 있을 겁니다. 




어느 어린이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101호와 102호의 차이가 아니라, 20평대와 30평대의 차이가 아니라, ‘밤새도록 설명할 수 있는’ 고유한 삶을 살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도 ‘자가'없이 불안에 떠는 소시민 어른이니까, 이 말은 어느 어린이보다 먼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는 평범하지 않은 걸 볼 때 마음이 더 놓입니다. '다양성' 속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일까요. 요즘은 여행을 못가서 인건지, '내 집'이 없어서 인건지, 불안이 도처에서 옵니다.




믹키 아파트 어느 집의 개성있는 현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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