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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리랜서 작가 Jan 18. 2024

프리랜서 1년차에 대기업과 계약

재취업을 확실히 포기하게 된 계기

크몽으로 조금씩 입지를 다지고 있던 때. 여느 날처럼 상담이 들어왔다. 비밀유지 때문에 여기에서 구체적인 기업명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처음 상담을 할 때부터 그쪽에서는 대기업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원고 내에서 캐릭터 A의 세계관에 맞지 않는 대사를 수정해달라는 의뢰였다. 당시 핸드폰만 들고 밖에 있던 때라서 얼핏 파일을 열어 확인해 보니, 분량이 많지 않았다. 해서, 견적을 낮게 불렀고 곧바로 진행했다.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 세계관과 꼼꼼히 비교해봐야할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내 욕심에 자꾸만 손을 보게 됐다. 이상한 구석에서 완벽주의가 비집고 나와서 여러 가지 대사를 입혀 보기도 하고, 의뢰한 영역이 아닌데도 잘못된 부분은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하면서도 '아, 단가를 너무 싸게 불렀네' 싶었지만, 이미 그 가격에 하기로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평소처럼 작업물을 보내고 구매확정을 부탁했다. 하지만 확정은 하지 않았고, 대신 며칠 후, 메시지를 보내왔다.


'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첨부된 한글 파일이 하나 있었다. 열어보니, 맨 아래에 외부 연락처와 기업명이 기재돼 있었다. 





처음에는 '?' 뿐이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기업이라고?' 하면서. 대기업의 자회사인가 계열사인가 사기인가!-를 생각하던 와중, 일단 컨택을 시도했다. 그러자 자세한 프로젝트 안내와 함께 대기업의 상징인, 눈이 부신 로고가 또렷히 박힌 메일을 받았다. 너무 어떨떨하고 놀라기도 해서, 그때 몇 번이나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프리랜서 1년 차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때부터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


'과연 대기업은 다르구나!'라고 느낀 부분은, 솔직히 많지 않다. 하지만 뭔가 복잡한 보완 시스템을 쓴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그 외에는, 일단 계약서를 줄 때부터 법무팀이 따로 있다는 것에 1차로 '오오!' 싶었고,  별도의 메신저를 이용한다는 것에 2차로 '아하!' 싶었다. 계약 과정이나 급여, 화상 회의에서는 크게 전문적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은 사실 받지 못했다.


구체적인 작업을 말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간략하게만 언급하자면, 상황에 따른 캐릭터의 대사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는데, 창의력이 살짝 필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분류를 반복하는 단순 작업이었다. 대기업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 과연 고무적이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작업 자체에 대한 나의 기여도는 아쉽게 남았다. 조금 더 다양한 방향을 꿰해보고 싶었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계약직 일원이었으니 자유도는 당연히 떨어졌다.


하지만 약 일년 동안 계약을 이어나가면서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얻었다. 바로, 자신감! 



'프리랜서로도 충분히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겠구나'




그 전까지는 크몽과 웹소설로 간간이 작업하고 수입을 내면서 한 달은 안심하고, 바로 다음달은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확실히 최저시급을 200만 원씩 받던 회사원때와는 다른 삶이니까. 프리랜서가 된 후부터는 1월은 300만, 2월은 50만 정도로 편차가 심해서 사실 거의 매일 알바몬과 사람인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대기업과 계약한 후로는 일단 급여가 안정적으로 들어오니까 당장 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이 이력을 살려 또 밥줄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실제로도 그랬고. 꼭 캐릭터 대사 구축과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대기업과 연이 닿은 것처럼 조금씩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 만약 '그때 크몽에서 의뢰를 받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되었을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랬다면 그간의 1년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 순간의 선택이 많은 걸 좌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일용직인 나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숲이 아닌 나무만 보던, 당장의 앞만 보며 사소한 것을 따지던 취준생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때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면 정말 끝장이라도 나는 줄로 알고, 한 번의 갈림길에서 최고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막다른 길이란 없다는 걸, 통로가 좁거나 넓을 수는 있어도 길이 끊길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프리랜서란, 일용직이란 즐거운 자극이 된다. 적어도 나는, 경리 생활을 하면서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던 시절보다는 지금처럼 땅따먹기 하듯 분야를 넓히고, 전문성을 키워가는 프리랜서 생활에 만족한다. 비록 그것을 위해 매일매일 조금씩 성장하려 단 하루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지만. 휴일에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인 듯하다.


어쨌든, 대기업과 한 번 계약되어 1년 동안 일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나의 커리어가 승승장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경험은 새로운 길이 있음을 확인하고, 프리랜서가 되기로 한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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