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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의 근사한 엔딩크레딧

by 오람찌



청룡영화상의 아이콘, 배우 김혜수. 정우성의 말처럼 청룡영화상은 곧 김혜수고 김혜수가 곧 청룡영화상이었다. 이번 청룡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배우 김혜수가 30년간 이끌어 온 청룡영화상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이다.


1993년, 무려 그녀가 22살 때부터 30년을 함께한 청룡영화상. 청룡은 그녀에게 감사의 의미로 세상 하나뿐인 청룡영화상이란 트로피를 선물했다. 서프라이즈로 진행된 이 특별한 엔딩크레딧은 데뷔 30주년을 맞은 배우 정우성 배우가 등장해 김혜수를 청룡영화상에서 떠나보내는 건 오랜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정과 같다며 영화인들을 대표해 연서를 읽으며 시작한다.


그리고 무대에 오른 김혜수.

다음은 그 엔딩크레딧의 일부다.


“언제나 그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습니다. 일이건 관계건 떠나보낼 땐 미련을 두지 않는데요. 다시 돌아가도 그 순간만큼 열정을 다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난 시간들에 대해서 후회없이 충실했다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화의 동향을 알고 또 그 지향점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청룡영화상과의 인연이 무려 30회, 햇수로는 31년이나 됐습니다. 한편 한편 너무나 소중한 우리 영화,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자리가 제게도 배우로서 성장을 확인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런 의미로 자리 잡게 됐던 것 같습니다. 서른 번의 청룡영화상을 함께 하면서 우리 영화가 얼마나 독자적이고 소중한지, 진정한 영화인의 연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던 것 같습니다. 매년 생생하고 감동적인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진심으로 배우들과 영화 관계자들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바로 이 청룡상 무대에서 배웠습니다."


그녀의 소감을 듣는 내내 놀랍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청룡영화상을 볼 때마다 그녀의 드레스보다 관심이 가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카리스마 있으면서 깔끔하고 센스있는 진행이었다. 실수도 어찌 그리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풀어내는지.


그런데 이렇게 즉흥적이고,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도 자기 생각을 근사하고 우아하게, 그리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놀라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여운을 주고 그 속에 살짝 곁들어진 유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시상식 내내 많은 영화인, 그리고 배우와 인연이 있어 축하공연을 하러 온 가수들까지 김혜수 배우의 지금까지 노고와 존경의 마음을, 정성으로 전했다. 이 배우는 살아오며 정말 많은 사람에게 따뜻한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녀의 근사함은 어디서 왔을까.


문득 그녀가 다독가로 유명한 배우란 사실이 떠올랐다.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도 서점을 찾고, 휴식을 취할 때는 이틀에 한 권씩 책을 읽는 독서광이라고.


"어떤 작가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의 책에 꽂혔다면 저는 그 작가가 쓴 책을 전부 사서 읽어요.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책이라면 해외 온라인 사이트에서 직접 구매하죠. 그러곤 따로 번역을 맡겨서 받아 읽는답니다."


다독한다고 모두가 그녀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삶에 녹아든 타인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재치 있으면서 근사한 대화법은 다독의 영향이 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요즘 떠오르는 생각을 표편할 때 부끄러울 정도로 엉망으로 튀어 나오고, 턱턱 막힐 때가 많다. 다독가의 글은 깊이가 다르고, 많은 무기를 장착한 느낌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 그것은 마치 댄서 왁씨나 오드리가 자기 주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어떤 음악이 나와도 찢어버리는 모습과 닮았다.


생각지도 못한, 김혜수 배우의 엔딩크레딧을 보고 독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모아놓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투리 시간. 올해는 이 귀한 자투리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읽고, 써야겠다.


그리고 청룡의 해를 맞아 새롭게 청룡영화상과 역사를 만들어갈 청룡의 새로운 주인이 몹시 궁금해진다.


혜수 언니, 고생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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