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갓집은 동네에서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무려 팔 남매가 있는 다복한 가정이었는데, 이 팔 남매는 지금껏 한번 싸운 적이 없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다. 오죽했으면 이 집안이 좋아서 장가가고 싶다는 총각이 있을 정도였다.
화목한 외가의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져 어린 시절 주말이면 온 가족이 외갓집에 모여 즐겁게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매주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먹이고, 치웠는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팔 남매 중에서도 막내라인 세 자매는 사이가 각별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촌끼리도 가까워져 지금도 계모임을 하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가족은 여섯째 이모네와 가까웠다. 엄마와 이모는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아빠와 이모부도 동갑에 성격도 잘 통해 친구처럼 지냈다. 그 덕에 이종사촌 이랑이는 태어나자마자 만난 나의 절친한 벗이 되었다. 나보다 한 살 언니지만, 우리의 사정을 봐줘 유치원도 같은 반을 다녔다. 그 시절 배변훈련 중이었던 나는 이랑이에게 항상 뒤처리를 부탁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고맙고 미안한...!
유치원 때 기억은 드문드문하지만, 이랑이네가 이사하고 나서의 허전했던 감정은 남아 있다. 이사를 앞두고 여섯째 이모는 가장 좋아하는 조카인 내 동생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서로 사는 곳은 멀어져도 우리의 우정은 계속됐다. 산, 바다, 계곡 어디든 함께하며 많은 추억을 쌓았다. 분위기 메이커는 언제나 우리 아빠와 이모부였다. 솔직하고 쾌활하신 두 분은 언변도 뛰어나 언제나 즐거움을 주었고, 식성도 어찌나 비슷하고 좋은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남은 음식까지 해치우셨다.
장난기가 많은 이모부는 재밌는 장난을 치며 언제나 유쾌하게 다가오셨고, 내 인생 최초의 별명도 지어주셨다(찐상). 차가 없던 우리 집을 배려해 많은 곳을 이모부의 차로 다녔고, 데려다주시기도 했다. 평소에는 한없이 밝지만, 예절과 시간약속에는 굉장히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시간이 흘러 그 꼬맹이들이 하나, 둘 결혼을 했다. 그쯤 팔 남매 중 가장 천사 같던 여섯째 이모가 유방암에 걸리고 만다. 이모는 긴 시간 병마와 싸우면서 많이 수척해지고 예민해졌다. 그리고 옆자리에는 이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조용히 뒷바라지하는 이모부가 계셨다. 이모를 살피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형제들과의 갈등까지 겹쳐 활기찬 이모부는 점점 과묵하고 날카로워지셨다.
이모와 이모부를 지켜보며 병마와 싸우는 당사자 못지않게 그 옆을 지키는 사람의 고통도 큼을 느꼈다. 모두가 이모를 걱정할 때 나는 이모부가 걱정됐다. 이모의 몸을 걱정하는 만큼이나, 이모부의 마음이 걱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모는 병마를 완벽하게 이겨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조금 안심하는 순간 이모부에게 루게릭병이 찾아왔다.
야속한 하늘이었다. 어질고, 평생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사셨던 두 분께 가혹한 시련이었다. 루게릭병은 엄청난 속도로 이모부를 삼켰다. 처음에는 단추를 잘 못 잠그는 정도였는데, 조금 지나 다리를 절뚝거리고, 머지않아 목소리를 앗아 가고, 호흡기 없이는 쉽게 숨도 쉬지 못하게 됐다. 루게릭병을 판정받은 지 2년도 되지 않아 음식도 못 먹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이모가 이모부의 그림자가 되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신체의 건강한 부분까지 악화한 이모가 마치 아이를 돌보듯 이모부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일상이었다. 너무 벅차 보였다. 하지만 이모는 끝까지 이모부를 자신의 손으로 지켜내고 싶어 했고, 이모부는 그런 이모를 쉼 없이 찾으며 한없이 의지했다.
겉모습은 아이처럼 보살핌을 받고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하셨다. 호흡기로 숨을 이어가던 순간에도 마지막 남아있는 손아귀 힘으로 어떻게든 앉으셔서 손님이 온 걸 반기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으로 담았다. 이모의 손바닥에 '조카'라는 두 글자를 쓰며 신혼여행 간 내 동생을 찾기도 하셨다. 똘방이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하트도 만드셨고, 이모에게 '지갑'이란 글자를 적으며 용돈까지 챙겨주셨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봤을 때처럼 이모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을 언니들의 마음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모부의 손을 꽉 잡고 또 오겠다고 인사한 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어느 아침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내가 이랑이를 달래줘야 하는데, 이랑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이랑이를 안고 울었다. 우리의 빛나는 추억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는 항상 이모부가 계셨다.
장례를 치르는 기간은 전국에 강추위가 몰아닥친 날이었다. 하지만 장의사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이모부의 마지막을 배웅한 덕에 그 추위가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경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눈도 흩날렸다.
살아가며 몇 번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은 내 인생을 흔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부의 죽음이 찾아왔다.
두 번의 시린 죽음을 지켜보며
사랑하는 이들과 다투고 찡그릴 시간이 어디 있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후회 없이 사랑하고 표현하기만 해도
모자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반짝이는 추억 속에 언제나 함께한 이모부. 이제는 너무 오래된 것 같은 이모부의 유쾌하고 즐거움 가득한 웃음소리. 부디 그곳에서는 건강하고 행복한 웃음 가득하시길 바란다.
보고 싶어요, 이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