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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냄새 물씬한 SF 영화 <미키 17>

by 오람찌


대체 언제 개봉하나 호기심에서 멀어질 때쯤 짜잔 등장한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 <기생충>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봉 감독의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는 어떠할지 몹시 궁금했다. 관람평을 살짝 보니 호불호가 갈려 기대에 우려가 더해진 채 극장을 찾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나는 완전 호!


봉준호 감독의 앞선 글로벌 프로젝트로는 <옥자>와 <설국열차>가 있었는데, <옥자>는 주제 의식은 좋았으나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았고, <설국열차>는 더 많은 기차칸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제작비가 부족했던(역대 한국영화 제작비 1위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두 작품의 아쉬움을 달래준 영화가 <미키 17>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감독의 전작 <옥자>, <설국열차>, <기생충>, <괴물>과 같은 작품이 스쳐 지나간다. <미키17>이 봉 감독의 최고 작품이라 할 순 없어도 언급된 작품의 주제의식을 포괄적으로 다룬 봉준호 세계관의 집합체 같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내게 봉 감독의 영화는 N차 관람할 자신이 없는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그런데도 너무 재미있기도 한 게 봉준호 영화다.


이 영화는 감독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한 번 더 관람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의 불편함 못지않게 즐길거리도 충분했다. 1억 1,8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제작 퀄리티와 영상미가 뛰어나 순식간에 2054년의 니플하임으로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휘황찬란한 미래적 요소가 가득한 SF 영화를 기대해선 안 된다. 땀 냄새 물씬한 SF영화이기에!





2054년의 지구는 빈부격차가 극명하게 벌어져 계급이 분명하게 나뉘고, 더욱 표독하고 남의 고통에 무감한 싸가지들이 넘쳐난다. 미키의 내레이션을 따라 그 잔혹한 발상에 입을 다물지 못하다 보면 어느새 미키의 세상에 들어온 나를 발견한다. 뻔한 장면도 봉준호의 색을 입으면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바뀌는 마법이 이루어진다. 깊이 와닿는 대사가 많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해서 관람하다 보니 나중에는 이 세계와의 헤어짐이 아쉽기도 했다.


미키의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영알못이지만) 그 특유의 말투와 억양에서 착하고 어리숙한 미키란 사람이 그대로 전해진다. 미키가 처한 다이내믹한 상황을 보면 이런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음이 다행일 정도다.


일반적인 SF영화의 주인공과 다르게 어찌 보면 멍청하고 불쌍한 주인공인 미키는 죽어도 되는 소모품 취급을 당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미키의 하루를 지켜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희생하는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미키는 대체로 온순한 사람이기에 무한 프린팅되어도 본래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 시스템적 오류로 미키17이 죽지 않은 채 미키 18이 등장해 두 명의 미키가 존재하게 된다. 미키 18은 지금까지 미키와는 다른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미키17과 정반대 쪽에 있는 아주 굵직한 존재의 다중 자아라 할까?


휴먼 프린팅 기술로 사람을 마치 서류처럼 무한으로 프린팅하며 삶을 이어가는 미키를 보며 저 미키들을 과연 하나의 미키라 볼 수 있을까? 저 삶이 과연 살아있는 삶인가? 의심이 들 때, 미키 18의 등장으로 더 큰 혼돈에 빠진다. 지구별 안의 인간끼리 더불어 사는 일도 보통이 아닌데, 개개인의 속에 숨어 있는 여러 자아끼리도 참으로 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구나 싶어지는.


미키 17은 18의 등장으로 비로소 완전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진정한 자아,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미키의 성장 스토리를 담기도 한 영화다.





로버트 패틴슨이 신인 시절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등장할 때만 해도 반짝 하이틴 스타일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연기에 대한 진심을 담아 독립영화와 블록버스터를 넘나들며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가더니 이번 <미키17>을 통해 오랜만에 그의 연기를 보니 이제는 명배우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듯하다. 첫 악역이라는 마크 러팔로와 일파 자체인 토니 콜렛의 연기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해외에선 씬스틸러라고 언급이 많더라.


반전 캐릭터이지 않을까 싶었던 나샤는 미키 18이 등장한 결정적 순간까지 아주 솔직한(?) 모습이 흥미로웠다. 정의롭고 진정성 있는 캐릭터인데, 마샬을 입으로 혼쭐내는 장면에서는 브라보를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해외에서는 실제로 박수가 터지는 장면이라고). 이런 게 찐 사이다구나 싶었던. 나오미 애키는 목소리에 힘이 있는 배우였다.


두 시간 동안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몇몇 장면이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봉준호 감독의 바람은 적어도 내겐 성공적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영화를 보는 동안 많은 장면에서 멈칫하고, 다양한 질문이 떠올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점점 더 영화에 몰입했다.





엔딩크레딧 직전, 미키 17이 미키 반스란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 <조커>의 아서 플렉이 떠올랐다.


아서와 미키. 어쩌면 많이 닮은 두 사람.

마지막까지 처참했던 아서와 달리 미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비교적 행복한 결말을 맞아 다행이다.


엄청난 찬사를 받은 전작 이후에도 담담하게 자신의 필모를 쌓아가는 봉준호 감독의 멘탈이 부럽다. 그리고 그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진다.



-내 여덟 번째 작품 < 미키17 >은 봉팔이가 만든 것이고, 그 전엔 봉칠이, 봉육이였다. 오스카상을 받은 게 만 50세였는데 그 전후로 저는 바뀐 것 없이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작업을 어떻게 이어가는지가 내겐 중요하다.



-그냥 좀 이상한 영화를 계속 만들어내는 감독으로 오래 기억되고 싶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봤다. '미키 17'의 시대적 배경인 2054년이면 내 나이가 여든다섯이 된다? 만약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만화 '은하철도 999'(1978)에 나오는 기계 몸을 장착하고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것 같다는...







+외계생명체 크리퍼가 생각보다 많은 귀여움을 받더라. 크리퍼 인형,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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