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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angebluegray Oct 18. 2020

04. 네 '조건'은 생각보다 별로야

그리고 '내 조건'은 네 생각 이상으로 괜찮아

 살다가 보니, 어쩌다 보니 내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해졌다. '사'자 직업을 가지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부터, 내가 다녔던 직장과 비슷한 사람들,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사실은) 이름조차 몰랐던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까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엇을 가졌고 가지지 못했는지, 어떤 취미나 물건을 가졌는지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직업이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나에게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신기하게 30대 즈음이 되자, 사람들은 내 생각 이상으로 '조건'에 집착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사를 가면 그 집이 서울 어디에 있는 아파트인지 검색해서 전세가를 알아내고, 차가 있다면 어떤 차인지, 무슨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어디서 뭘 먹고 다니는지 인스타그램이든 누군가를 통해서든 알아내고 나를 재고 있었다.


 사실 그 마저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 자체도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담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조건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대하면서, 내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다는 것을. 내가 대학이나 직장을 잘 간 것은 외국에서 살아온 운 빨이며, 살이 빠졌어도 더 예쁜 사람은 많으며, 등등으로 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나의 열등감'을 억지로 찾아내고 스스로에게 스크래치를 내고 있음을. 




 첫 소개팅(올해 처음으로 소개팅을 시작했다)으로 만난 친구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전 회사 후배가 '아무나 만나 봐'라며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렸고, 얼굴도 괜찮았고, 사진을 보니 확실한 운동 취미도 있었다. 이 친구도 내 사진 몇장과 '대략적인 조건'만 들었을 땐 만나볼 만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소개팅이 주선되었다. 


 우리집과 가까운 곳으로 오겠다기에 내가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만나서 대화도 잘 통하고 즐거웠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단지 '내가 가까운 곳으로 와 주었다' 는 사실 하나가 걸려 저녁을 계산했다. 서로가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 날 저녁을 내가 샀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이틀 뒤로 두 번째 만남을 약속했다. 두 번 째 만남은 더 즐거웠고, 더 친밀해지기도 했다. 


이 날의 문제는 둘 다 술에 취해 서로의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은 것이었다.


 이 후,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날, 내가 호감 표현을 조금 더 하기도 했는데, 그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간 주선자로부터 들은 사실인데, 이 친구는 내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직장이 멀기도 하고(심지어 순환근무 스케줄), 차도 없고 여러모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스케줄이 꼬여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서로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기만 하면서 의미 없는 연락을 힘들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결국, 이 소개팅의 결말도 꾸역꾸역과 흐지부지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절당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주변 사람들을 포함하여 상담 선생님께도 이 친구와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정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야, 얘 진짜 별로인데? 그래, 운동해서 몸이 좋은 건 인정, 그거 말고 뭐?' 

'아니야, 사실 만나면 실물도 더 괜찮고 재밌고...'


 직장이 멀고 스케줄이 비정기적이면 출퇴근이 정기적이고 차가 있는 내가 가면 되고, 동호회 때문에 아는 이성 지인이 많고 바빠도 나도 친구가 많고 약속이 잦으니까, 라는 식으로 나는 구구절절 괜찮은 이유를 찾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나를 좋아하는가?'라는 감정 하나였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왜 이 사람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몸을 열심히 다진 걸 빼고 객관적으로 보면 나보다 그닥 나은 건 없었다. 거절에 대한 자기방어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한 친구는 이 친구가 달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야, #선팔하면맞팔가요? 이거 진짜 극혐이다, 대체 뭐가 좋다는거야' 


 아...그건 정말 내가 흐린눈으로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을까, 인스타그램에 올린 무엇 때문에 답장이 이렇게 느린 걸까. 그 친구와 연락을 하는 동안부터 연락이 끊긴 지금까지,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열등감에 빠져가고 있었고,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서, 그 친구도 똑같이 느꼈을 수도 있었음을. 그런데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면서 어떤지 조건을 따지고 있었음을.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다 나에게 '감정도 안 생기고' 라는 말로 상처를 주었다는 걸.


 나도 앞으로 조건을 따지기로 했다. 아무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람의 감정만을 갈망하다가, 상대가 따지는 조건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살면서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그 친구를 마주치면 붙잡고 말하기로 다짐했다. '그 때 말 못했는데, 너 생각보다 별로야. 그리고 난 네 생각보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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