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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정윤 Jan 03. 2024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만 거창하네요. 그냥 2024년 목표입니다.

새해라고 하는데 아직은 멍하다. 12월 31일 이후 단 이틀이 지난 것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너도 나도 2024년의 목표를 말하는 시기여서 나 또한 올해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해보지만 아직까지는 딱히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분히 충동적으로 올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를 써본다. (글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쭈굴쭈굴)) 이 글이 성지글이 되기를, 올해 1년을 살아가는데 좋은 의도와 방향을 세워주기를. 또한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글을 쓰기를 바라며 한 자 한 자 적어본다.




올해는 내가 있던 자리를 바꾸려고 한다. 퇴사를 한다는 말이다. 지난 몇 년간 직업적 고민이 많았다. 안정적인 지금의 자리는 따습다. 가끔은 곤란해도 안정적인 일상과 고정적인 수입을 준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에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설레지 않은 건 너무도 오래되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설레지 않는다'와 같은 진부한 대사 따위는 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게 되는 순간도 삶에는 있는 법이다. 이런 진부한 대사를 할 때면 어김없이 진부한 드라마 대사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냐? 다 똑같아."

"바깥은 춥다."

"말이야 쉽지.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어."


나 또한 이런 말들에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깥세상은 춥고, 삶을 산다는 것이 애들 장난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다. 먹고산다는 것에 메여 사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뭐라고 무엇을 넘어서 보겠다는 말인가. 모든 답에 자신이 없는 것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어쩌면 저 말속에 담긴 냉소와 포기가 한계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장 많이 하는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이 실은 넘을 수 없는 한계이고 스스로에게 감옥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결혼에 대한 온갖 비교와 계산을 하던 사람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듣고만 있었는데 한참을 이야기하다 나는 어떻냐고 물었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 힘든 거야. 뭘 꼭 해야 한다, 뭘 꼭 이루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안 하면 의외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귀한 면들이 보이던데."


"하긴 맞아. 생각이 많아서 문제 이긴 해. 근데 알지? 어쩔 수 없는 거. 다들 그렇게 살잖아. 비교하고. 어쩔 수 없음."


나는 웃고 말았지만 그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왜 어쩔 수 없는 거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외의 논의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할 수도 없고, 다른 대안은 있는지도 생각할 수가 없다. 해결책이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숨어 자신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냉소만 짓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내가 나에게 주는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삶으로 다시 들어가 같은 고통과 기쁨을 느끼고 타인의 삶과 비교하며 잠시 잠깐만 다른 삶을 꿈꿔보는 것. 이럴 때 삶은 SF 소설처럼 공상과학이 된다. '저런 삶은 꿈같아서 내게는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본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그 손끝이 얼마나 절묘하고 정교한지 세상은 예측할 수도 없게 복잡하고 짜임이 미묘하며, 신비로워 모든 사람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각자 최고의 행복을 차지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그 때문에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실은 만들어 줬다고 말이다. 그러니 나의 행복을 찾아 한번쯤 도전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삶에서 행불행이 무엇이 꼭 있어야만 달성되는 것은 아님은 우리는 안다. 최소한의 조건은 필요하다고 아무리 악다구니를 쓰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비렁뱅이가 행복할 수도 있음을 때로 가슴은 안다. 실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나보다 못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고 외모부터 학력, 재산까지 모든 것을 갖춘 듯 하지만 불안과 공황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보는 것이다. 행불행의 조건이 생일 케이크 자르듯이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고, 때로는 불운이 행복을 만드는 열쇠가 되고 행운이 불운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결국 결론은 이것뿐이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가슴이 한 번만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내달라 요청할 때에는 그 길을 따르는 것뿐이다. 최근에 읽은 바딤 젤란드의 책에서 행복은 뭔가를 손에 넣었거나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과정, 존재가 기쁨과 의미로 가득 차는 그 길에 있다는 글을 읽었다. 목표는 지향점이 아니라 길이라는 말.


사람에게는 각자의 소명이 있다고들 한다. 소명은 대단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라도 그 길에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는 그런 길이다. 나라는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가진 듯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들이 정해진 듯도 하지만 그 중간 어디쯤에 진실이 있다. 그래서 어떤 길은 너무도 수월하고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어떤 길은 타고난 나를 버리고 가야 하는 고행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길을 찾은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대로 쭉 지속될지 아니면 잠시의 변덕인지 그것은 두고 보려고 한다. 다만, 지금으로서 딱 하나 아는 것은 지금 가는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그냥 직감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사실은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도 재밌어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이제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일로 성공을 꿈꿀 때 이렇듯 가슴이 답답하고 옥죄어 올리가 없다. 만약에 이 길이 나의 길이라면 말이다. 이 일을 늦게 안 이유는 그럴듯한 성공하는 그림만 꿈꿔왔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에 내가 기쁘고 즐거워하며, 마음이 축제가 열린 듯 기꺼워하는지 보다 멋들어진 정장차림에 수월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비싼 명품 가방 한 두 개는 가지고 있는 커리어우먼을 꿈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올해 나는 가슴이 시키는 그 길을 가보려고 한다. 자신감 있게 글로 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두렵다. 나에게 무엇인가 없을까 봐 두렵고 시기가 아닐까 봐 두렵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어 두렵다. 하지만 이번 남은 생은 다른 방식으로 도전해 보기로 했으므로 두려움이 뚫고 지나가도록 둔다. 이번에 본 듄 영화의 대사처럼.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그곳에 남아 있는 온전한 자아를 인식한다. 그리고 계속하는 것이다. 최근에 본 글에서 읽은 이슬아 작가가 썼다는 문구처럼 말이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올해 나의 소명이 이끄는 축제와 같은 길에서, 그 꾸준한 발걸음 속에서 동료를 만나기를 기원한다. 올해 2024년에는 생각과 마음을 깊게 나누는 동료를 만날 것이다. 삶에 대한 깊이를 나누며, 몸과 마음을 이해하며, 사랑과 다정함으로 선함의 에너지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나의 사람들을.


2024년,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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