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가 이어지는 한 지점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by 콩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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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달아 다양한 영화를 보고 있다. 최근 본 영화 중에 ‘우리도 사랑일까’,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삶의 권태와 적막 빈틈에 대한 이야기


새로움은 곧 낡은 것이 되고 낡은 것은 원래는 반짝이던 무엇인가 였다. 인생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싱그럽게 빛나던 시절은 무기력해지고 무덤덤해진다. 그때 우리는 인생의 왈츠를 찾아 떠난다. 설레게 하는 무엇, 생의 환희를 줄 무엇을 찾지만 그것도 다시 낡아지고 우리는 또다시 권태에 잠식당한다.


실제로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날마다 해는 뜨고 진다. 이제 겨울이 지나 해가 조금 일찍 뜨지만 어스름한 빛이 창문가로 새어들기 시작하면 여느 때와 같이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똑같은 숨을 쉬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한 후 집을 나선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365일 같은 햇빛은 창가로 스며들고 나는 같은 숨을 쉬고 깨어나 길거리로 나선다.


생의 큰 변화는 많이 없다. 보통의 삶이라면 이런 항상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다람쥐 챗바퀴도는 삶이라 말하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플랭크와 에이프릴은 희망 없고, 의미 없는 삶이라고 표현한다. 삶에서 줄 수 있는 색다른 시도란 잠깐의 외도 외에 없는 삶.


그리고 돌아와 영화 패터슨의 버스 운전기사를 생각한다. 다른 하루 속에서 담담히 시를 적어가던.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 승객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어느 날 만난 꼬마 시인이 선사하는 그 하루의 특별함을 아는 사람. 그렇게 삶은 실은 조용한 변주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찌들어 가는 건 자신일 뿐이다. 세심한 눈으로, 깊이 있는 눈으로 본다면 삶의 과정에 닮아 있는 것이란 없고, 지금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수천 가지임을 우리는 모른 채 살아간다. 더 많은 자극과 설렘을 원할 뿐 음미할 줄 모르며 살아간다. 어쩌면 이 두 영화는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나를 설레게 하던 빛나던 당신은 어느덧 현실에 안주한 아저씨가 되어 있다. 세계를 유랑하고 꿈을 꾸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던 당신은 어디 가고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생일날 밥을 먹는다. “나에게 할 말이 없어?”라고 물어보지만 “매일 보는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하는 반응뿐이다. 붙어살고 있기에 우리는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 그렇게 세월은 켜켜이 쌓여간다.


오랜 시간 함께한 인연은 단순히 사랑으로 표현되기 힘든 무엇이 자리 잡는다. 대부분의 생활, 관계는 연결되어 있고 내 소소한 습관까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이게 사랑인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우리는 사랑일 까에서 사라 폴리는 말한다.


“살다 보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울 순 없어.”


모든 관계에서, 타인에게서 모든 빈틈을 다 메우며 살아갈 수 없다. 한 때 새 것이었던 것들은 헌 것이 된다. 그리고 그때 그 틈을 메우겠다고 끊임없는 왈츠를 찾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것을 찾아 떠난 사람을 비난할 수도 없다. 다른 것이 대체될 뿐 관계의 변화는 똑같으므로. 우리는 이 본질을 알았을 때 씁쓸하다. 지금 잡은 이 왈츠가 언젠가는 지금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그 빈틈을 작은 것을 음미할 줄 아는 일상의 예술이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연인의 주름이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관찰, 조금은 어제와 달라진 햇빛을 만끽하며 걷는 거리, 그리고 그 다름을 시로 쓸 수 있는 깊이.. 이것을 제외해 버리면 그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메우며 살 수 있을까?


이 삶을 벗어날 수 있다면 꼭 파리가 아니어도 됐다는 권태에 짓눌린 에이프릴의 절망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일상의 반복은 생의 생기만 앗아갈 뿐임을.


빛나던 개성의 누군가는 현실의 벽 앞에 개성을 잃고 고루한 30대, 40대의 그 누군가가 되어 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