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프롤로그: 그냥 쓰는 맛

by 콩작가


나에게는 병이 하나 있다. 무엇이든 ‘잘’ 하고 싶어지는 병. 요가를 하면 요가를 잘하고 싶고, 명상을 하면 명상을 잘하고 싶고, 공부를 하면 공부를 잘하고 싶다. 글을 쓰면 글을 기. 똥. 차. 게 잘 쓰고 싶다.


이 병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 그냥 하던 공부도 더 잘하고 싶어 지면서 성적이 떨어졌다. 요가도 더 잘하고 싶어 애를 쓰다 요태기가 왔다. 일도 더 잘하고 싶어 안달할 때 번아웃이 왔다.


병의 증상은 이렇다. 먼저 몸이 굳는다. 손발이 굳고 어깨가 딱딱해진다. 그다음은 두통. 머리가 띵하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병은 금세 마음으로 전이된다.


깔깔 웃으며 하던 일이 심각해진다. 심각해지면 열정이 식는다. 그 자리에 괴로움이 찾아온다. 좋던 일이 재미없어진다. 어느 순간 억지로 하고 있다. 억지로 하니 결과가 좋지 않다. 무한 루프에 빠진다.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나는 재능이 없나 봐.’


자학은 말기 증상이다. 이쯤 되면 포기가 답이다.


‘에라이, 다 재미없어!’
‘이제 안 해!’
‘지긋지긋해!’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진정한 성취도 없다.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를 썼다. 에너지는 이미 고갈되어 버렸다. 고갈된 에너지는 권태기를 부른다.


그래서 격. 하. 게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했다. 어느 날 찾아온 깨달음이다. 귓가에 종이 울리고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인생 목표가 새로 써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는 숨만 쉴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그냥 적기만 하겠다. 작가가 되겠다느니, 잘 쓰고 싶다느니, 인기글이 되겠다느니—이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겠다.


오로지 지금 하는 것에 감각을 집중하겠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그 찰나에 걸겠다. 이 모든 결심은 불치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다.


매일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한 나만의 투병 일기를 여기에 적는다.


흥, 아주 제. 대. 로. 하찮아지겠어!



0924.jpg 하찮아지기 위해 주말에 인제에 다녀왔다. 자작나무 숲 가는 길. 걷기만 하겠어! 더 뭐 안 해!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