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한 영화 대사들

빙빙빙빙 맴도는 영화와 드라마 대사 02

by 콩작가

용서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와 드라마 대사가 있다. 나는 용서란 내가 타인에게 혹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했다. 용서했다고 하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잘못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깊이 뉘우치고, 상대는 이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너무 클리셰 범벅 같은 이 흔하디 흔한 장면은 용서에 대한 내 고정관념의 단편이다. 하지만 용서란 2인 이상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용서의 시작은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는 것에서부터 인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관계 회복이 주목적이 아닌 내 안에서 응어리진 마음을 이제는 놓아주는 것. 그것이 용서의 9할 이상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 ‘매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3.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감독: 데이비드 O. 러셀, 2013)



티파니: 나는 걸레였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질척대고 더러운 것도 내 모습이지만, 난 좋아요. 다른 모습들처럼.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Tiffany : I was a big slut, but I'm not anymore. There will always be a part of me that is sloppy and dirty, but I like that, just like all the other parts of myself. I can forgive. Can you say the same for yourself, fucker? Can you forgive? Are you capable of that?


아내의 불륜 현장을 눈으로 목격하고 정서가 불안해진 남자 팻과 남편과 사별 후 여러 남자와 자며 우울함을 달랬던 여자 티파니와의 사랑 이야기다. 불안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지 과정도 흥미롭지만, 불안정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용서하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팻은 아내의 불륜 이후로 정신적 불안정을 겪고, 다 끝나버린 아내와의 관계에 집착한다. 까만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달리는 팻. 그런 그를 티파니가 쫓는다. 팻은 그런 티파니에게 저리 가라고 소리친다. 가지 않으니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려 버리는 팻. 거기에 대해 티파니가 하는 말이다.


한때 휘청이고 아팠고 지금은 아니다. 질척이며 더럽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조차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도 자신이 가진 여러 모습들 중 하나로 봐주고 좋아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티파니.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냐고.


때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용서할 수 없다.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참을 수가 없는지.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다른지. 질책하고 책망하며 그런 모습을 없애 버리려 하거나 아예 인정도 하고 싶지 않아 한다. 티파니는 그런 자신에게서, 자신의 상처로부터 눈을 돌려버리고, 도망만 치려는 팻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용서해 줄 수 있나요? 그런 자신도 받아들여주며, 나의 최상의 모습처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티파니: 노래가 뭐라고. 평생 무서워하며 살 거예요? 그냥 노래예요. 괴물로 만들지 말아요. 숨 쉬어요.


Tiffany: You gonna go your whole life scared of that song? It’s a song. Don’t make it a monster.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할 때 들었던 노래만 나오면 팻은 패닉을 겪는다. 마음을 연 티파니에게 섣부른 판단평가로 상처를 줘 놓고 팻은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그때 그 노래에 어쩔 줄 몰라한다. 티파니는 그런 그에게 가서 말한다.


당신 안에서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괴물로 만들지 말라고. 이깟 노래 하나를 평생 두려워할 거냐고. 숨을 쉬라고. 팻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티파니를 본다.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삶을 지배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사. 때로 상처받은 마음은 그 상황을 무서운 괴물처럼 느끼게 한다. 마음은 두려움으로 무장한 채 그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비슷한 상황만 봐도 정신없이 경보를 울린다.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만드는 환상은 자신을 좀먹는다.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노래일지라도.


당신의 상처의 실체가 무엇인지 똑바로 보라. 그리고 상처받은 당신이여, 부디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말아라. 그것은 그저 노래일 뿐이다.







4.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 (HBO 드라마, 2021)




엄마: 내가 네게 바라던 게 그거란다. 메리앤. 너 자신을 용서해 주렴. 케빈 일 말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한 마을의 살인 사건을 다룬 HBO의 드라마. 스릴러 드라마인 줄 알고 정주행 했는데 상처와 용서에 대한 드라마였다.


메어는 이스트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의 형사다. 그녀는 형사로 풀리지 않은 살인 사건을 해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산적해 있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도 해결해야만 한다. 언제나 지쳐 보이는 그녀. 그리고 그녀에게는 큰 상처가 있다. 그녀의 아들 케빈이 자살을 한 것. 어린 나이에 방황하고 약을 하며 제정신이 아니게 살아간 케빈은 약에 취해 메어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고는 짧은 생을 마감해 버린다. 그 뒤로 그녀는 케빈에 대해서 입 밖으로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런 그녀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도 케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다 해결되고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메어의 손자(죽은 아들의 아이)가 메어의 어머니에게 반창고를 다시 붙여 달라고 하니 너무도 자상하게 해주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한 마디 한다.


“믿어지지가 않네요. 내가 어렸을 때 그랬으면 닥치고 알아서 다시 붙이라고 했을 거면서.”


어렸을 적 불안한 가정에서 상처를 받고 자라온 메어는 그런 엄마를 보며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조금은 원망의 마음을 담아. 당신 때문에 받은 상처에 대해 탓을 하듯 말한다. 그런 엄마는 담담하게 듣다가 말한다.


“사실 난 그때 분노에 차 있었어. 네 아빠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서 화가 났었고 내가 그를 고칠 수 없는 것도 화가 났었지. 그리고 그걸 외적으로 풀었던 것 같아. 너한테 말이야. 미안하다. 메어.”


엄마는 어렸던 자신과 그래서 상처받았던 메어에게 진솔하게 사과한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엄마가 내놓는 진심에 메어는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다행이라고 말한 후, 자신도 오래전에 그런 자신을 용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운다. 그녀는 울음으로 붉어진 눈을 하고 메어를 향해 말한다.


메어 자신을 용서하라고. 큰 아들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던 것도, 그런 그를 죽지 않게 만들지 못했던 것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흔들린다. 그렇기에 때로 그때 내가 했던 행동이 가장 최선일 때도 있다.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기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때의 어리석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 그것뿐이었다.


메어는 아들이 그렇게 떠나고 자신이 엄마이기에 자신을 더 용서할 수 없다. 자식에게 무엇이 최선이었는지 모른 채 살아간 자신을. 하지만 수많은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때 자신 또한 불안정하고 어리석었음을, 상처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음을 알아봐 줄 수 있냐고 엄마는 딸 메어에게 말한다.








5. 매스 (감독: 프란 크랜즈, 2022)




게일: 두 사람을 용서하면 아이를 진짜로 잃는 것 같아 용서를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냥 대화가 필요했나 봐요. 이제 알 것 같아요. 두 사람을 용서했어요. 이미 당신들을 용서했어요. 난 헤이든도 용서할 거예요.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용서할게요. 더는 이렇게 못살겠어요. 잠도 못 자고 숨도 못 쉬고.. 바뀌지 않는 과거에 집착하는 게 너무 괴로워! 이러면 다시는 에번을 못 볼 것 같아!



여기 4명의 사람이 만난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자리다. 이 자리를 위해 놓여 있는 화분의 위치까지 섬세하게 조정한다. 이 4명의 사람은 서로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의 부모와 피해자의 부모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라고 한다.


아주 비극적 사건으로 이 두 부모는 자식을 잃었다. 한쪽은 가해자의 부모지만 자신의 아들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피해자의 부모는 그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다.


사건이 지나고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사건은 오래전에 일어났고 서로는 충분히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죽일 듯이 탓도 해보고 애써 어이없는 이 사건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이 영화의 백미는 서로가 원망, 슬픔, 분노 같은 형형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고, 서로에게 비난만 퍼붓는 자리가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것이 아주 팽팽한 심리적 긴장감의 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4명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흡입력 있는 연기는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피해자의 부모는 아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분명 가해자의 가정에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가해자는 문제가 많기만 한 괴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심리를 보인다. 그래야만 자신의 아들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이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을 더 강하게 탓할 수 있기에. 하지만 가해자 또한 평범한 가정에 사랑받고 자라온 아이였고, 가해자의 부모도 아들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그 사건으로 충분히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리고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게일이 하는 대사. 그녀는 펑펑 울며 말한다. 용서하고 싶지 않았고 용서하면 안 될 것 같았다고. 그러면 아들을 진짜 잃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이제 놓아주고 싶다고 말한다. 놓지 못하는 이 아픔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숨도 쉬지 못한다. 수많은 세월 지나가버린 과거가 삶을 짓누르고 자신을 짓누르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제 용서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게일의 대사에서 용서의 시작을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듯 모든 것을 놓겠다는 것이 아니다. 증오하고 탓을 하고, 놓아주지 못하는 삶에서 고통받는 것은 가해자도 아니고 가해자의 부모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이다.


살아가야 할 사람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서였다. 나는 용서가 이제부터 가해자 부모와 가해자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손 붙잡고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지배했던 상처를 보내주고, 사랑하는 아들과의 진정한 작별을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이 용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용서를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의 삶 또한 소중하며, 살아남은 이들의 인생 또한 존중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죽은 아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라는 걸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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