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배달부 키키와 영웅의 여정 01
모든 성장에는 떠남이 있다. 최근에 읽은 책과 영화의 주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떤 책과 함께 하는 동안에는 그 책이 그 시기의 마음의 풍경을 만들고 내면의 주제를 정한다.
이달에 읽은 책은 캐럴 피어슨의 <나는 나 (류시화 번역)>라는 책이다. 칼 융이 말한 심리적 원형 6가지를 정리한 책이다. 원형에 대한 자세한 정의와 책에 대한 설명은 너무 장황할 것 같아서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또 오늘은 영화 <마녀배달부 키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기 때문에 과감하게 생략한다.
<나는 나>라는 책을 읽고 마녀배달부 키키라는 영화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듯 내면에 고아, 방랑자, 전사, 이타주의자, 순수주의자, 마법사의 6가지 심리적 원형들이 자리 잡고 있고, 자아란 한평생에 걸쳐 6가지 원형이 가지는 순수의 상태, 미성숙한 상태, 부정적이고 왜곡의 상태를 벗어나 깊어지고, 넓어지고,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면, 또 우리는 이를 위해 설화 속 영웅처럼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이자 모험가라면, 미야자기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마녀배달부의 키키>는 이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형연구소 CASA 소장이며 원형에 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캐럴 피어슨의 명저인 이 책(원제 『내 안의 영웅 The Hero Within』)은 인간의 영혼, 혹은 마음 세계로의 탐험 여행이다. 융이 말했듯이,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야말로 깨어서 사는 것이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나가 있다. 그 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바로 그 탐험 여행을 떠날 때이다.
저자는 말한다.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영웅의 여행에는 어느 정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에고는 필사적으로 안전을 원한다. 반면에 영혼은 진정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한 가지 진리는 이것이다. 모험 없이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시련 없이는 깊어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만족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든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그 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너에게 모든 것이 열려 있으니, 걸음을 옮겨라. 두 다리가 지쳐 무거워지면 너의 날개가 자라나 너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 올 것이니. - 잘랄루딘 루미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우리 안의 어떤 원형은 기쁨의 이야기를 펼칠 것이고, 어떤 억압된 원형은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의 줄거리를 창조할 것이다. 인생은 쇄빙선같이 그 기쁨과 고통을 부숴 나가며 길을 내어 목적지에 이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자아는 태어나면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완성해 나가야 하는 여정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 이 ‘자기 앎’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행위와 성취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탐구 여정의 끝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융이 자서전 『기억, 꿈, 회상』에 쓴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전 생애는 무의식이 자기실현을 해 나간 이야기이다.‘ - <나는 나>, 류시화, 캐럴피어슨
<* 아래 내용에는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떠나야 할 시기는
자신이 정한다.
키키: 지지, 오늘 밤으로 정했어. 출발하자!
마녀로 태어난 아이는 13살이 되면 살던 곳을 떠나 수련을 떠나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시선은 이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독립의 시기를 정한다는 것.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1989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한다.
13살의 어린 여자 아이에게 미아자키 하야오는 충분한 힘과 독립성을 부여한다. 키키는 자신이 떠나야 할 시기를 자신이 정한다. 80년대는 권위주의의 시대였다. 물론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가부장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이는 깊이 있는 시선인 것 같다. 어린이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의 종속된 존재로만 여겨왔던 시기에 감독은 처음부터 키키의 나이와 상관없이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서 존중을 보여준다.
그 사회의 인권의식을 보고 싶다면 그 사회가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이 없는 아이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아이를 대하는 시선은 그 사회가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시선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약자를 향한 시선, 인권의식을 알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키키가 독립하는 과정은 너무도 심플하다. 바람 부는 들판에 누워 마을을 내려다보며 라디오를 듣다 문득 떠나는 날을 오늘 밤으로 정한다.
이 말을 듣고 부모는 떠나는 키키의 말에 반대하는 말 한마디 없다. ‘어쩌면 그렇게 충동적이니.’라고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 마을의 모든 어른은 키키가 정한 ‘오늘 밤 떠난다는 계획’을 충분히 존중한다. 13살 마녀 키키가 떠나고자 하는 순간을 정했다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응원과 지지다. 키키의 독립은 환대받는다. 부모님을 포함해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서 키키의 출발을 축하해 준다.
이토록 이상적인 독립이라니.
언제나 우리는 순수의 세계를 파괴당한다.
하지만 진짜 삶은 잿더미 위에 세워진다.
명랑하고 밝은 키키의 첫출발은 즐겁다. 폭우가 쏟아져 기차로 비를 피하고,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자지만 그것마저 행복하다. 키키가 원하는 것은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다. 마을을 정하고 빗자루를 타고 내려와 만나는 것은 냉대와 무관심이다.
멋진 시계탑, 자동차들과 잘 꾸민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이 마을에 살고 싶다는 키키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반응뿐이다. 키키가 당황할 새도 없이 경찰관이 키키를 붙잡는다. 그렇게 날아다니면 어쩌냐고 나무란다.
키키는 환대받지 못한다. 13살 아이의 순수했던 미래 계획은 무너진다. 자신이 이 화려한 도시에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몰려온다. 키키는 시무룩해지고 여기서 톰보를 만난다. 톰보 역시 자신을 놀리고 신기하게 보는 것만 같아서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천진난만했던 내면의 상태는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이다. ‘세상은 나를 좋아할 것이다. 나는 사랑받을 것이다. 나는 충분한 보호와 안전 속에 살아갈 것이다’ 같은 생각이나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는 느낌들, 순수의 세계는 언제나 파괴당한다. 그 이유는 세상이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내면의 자아가 순수하고 평화로운 형태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삶과 세상은 수많은 복잡한 우연들이 겹쳐지고, 나의 의지와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얽히고설키며 나의 삶과 융화되면서 이루는 경이로운 우주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가진 재능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생기를 얻는다.
키키는 우연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한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빵집을 찾은 한 손님이 아이에게 물릴 공갈 젖꼭지를 두고 언덕을 내려가 버린다. 키키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서 그것을 전해주고 이후 빵집 아주머니의 집에 머물며 배달 일을 시작한다.
자신이 속할 곳이 있다는 것, 어떤 쓸모가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다. 삶에서 일은 고통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그 일이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 기쁨의 크기는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그 일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의 성향이나 살면서 만들어진 가치관과 혹시 위배되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인 것이다.
마녀의 피를 이어받은 키키는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알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들을 해야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할 일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키키는 자신이 가진 밝고 명랑함을 되찾는다. 내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것 하나만으로 삶의 생기를 얻는다.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마법은 사라진다.
하지만 여전히 자아의 힘이 약했던 키키는 그런 와중에도 멋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디자이너나 톰보의 친구들을 신경 쓴다. 수련 기간에는 검은 옷만 입어야 하는 철칙 때문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불만이다.
키키는 배달 일을 하며 톰보의 친구들과 여는 파티에 초대된다. 파티에 초대된 그날 키키는 할머니가 손녀의 생일잔치를 위해 손수 만든 파이를 배달하는 일을 맡는다. 하지만 전기로 돌아가는 오븐이 고장이 나서 파이를 굽지 못하게 되자 할머니는 키키에게 수고비를 줄 테니 돌아가라고 한다.
키키는 집에 있던 화덕을 써보자고 제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화덕에 불을 지필 나무를 옮기며 할머니를 돕는다. 화덕이 달아오르고 파이가 완성되자 키키는 부랴부랴 파이를 싣고 빗자루를 타고 손녀의 집으로 향한다. 그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이 파이를 잘 전달해야 한다는 마음에 키키는 자신이 다 젖든 말든 상관없이 파이를 치마로 감싸며 배달한다. 홀딱 젖은 모습으로 파티장 앞에 나타나 파이를 전해주는 키키. 수령인인 손녀는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나와서 투덜댄다. 좋아하지도 않는 파이를 또 할머니가 보내줬다며.
화려한 파티장 앞에서 키키는 마음이 상한다. 자신이 그토록 성심 성의껏 해왔던 일이 부정당하는 기분, 화려하게 꾸민 소녀 앞에서 자신은 젖은 채로 서있는 상황에 초라한 기분을 느끼며 키키는 돌아온다. 그리고 지지에게 밥도 주지 않고 하루를 꼬박 앓는다.
아픈 다음날 빵집 아주머니 심부름으로 걸어서 톰보의 집으로 향하고, 키키는 그날 톰보가 조립한 비행기 날개를 단 자전거를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톰보의 친구들이 나타나고, 그중에는 파티의 주인공 여자 아이도 함께 있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선을 보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비행기를 좋아하는 톰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키키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키키는 싫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뒤돌아 집으로 향한다.
그 뒤로 키키의 마법은 사라진다.
마법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키키의 엄마는 키키에게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어린 키키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도 외부에 여전히 시선이 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화려한 파티장 앞에서 초라한 자신, 그리고 자신의 일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키키는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다. 갑자기 해오던 모든 마법은 하루아침에 약해지고, 지지는 평범한 고양이가 되어 자신의 곁에 머문다.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갈 때 가지고 있던 마법도 풀리는 것이다. 이때 자신에 대한 판단의 주도권은 타인과 외부가 가져가 버린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와 나의 일이 중요해진다.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결정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가지고 있던 진짜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키키의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