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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두 얼굴

냉장고가 살아있다

by 미진

주말이면 식구들이 모여 월남쌈을 먹는다. 제 손으로 싸서 먹을 뿐이지 온갖 야채를 씻고, 썰고, 부족한 재료를 채워 넣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거참, 골고루 먹으라니까. 남은 야채가 많다.


남은 야채는 볶아 김밥을 돌돌 만다. 김밥을 싸고 남은 재료는 삶은 당면에 간장, 매실청, 참기름, 통깨 등을 휘리릭, 탁탁 톡톡 두르고 섞는다. 잡채 완성이다. 바쁜 아침, 잡채 덮밥도 좋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면 남은 잡채를 김에 돌돌 말아 튀긴다. 분식집 김말이다. 웬걸, 인기가 제법이다. 리필 요청이 들어오기 전, 재빨리 야채를 준비한다. 더 먹어. 배부르단다. 맛있다며.


내일은 월남쌈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다. 음식이 음식을 낳는다. 냉장고가 살아있다.


내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목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제일 좋다더니 정말 그랬다. 아이들 입에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 노릇에 신명이 났다. 자식 먹이는 일에 흥이 돋았다.


나 홀로의 자유가 주어진 며칠, 나는 나를 보았다. 나태와 게으름으로 점철된 폐인을. 풀잎으로 몸을 가리고 아담이 주는 사과를 먹으며 유유자적하는 에덴동산의 하와를.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주어진 자유에 화들짝 놀라 뒤로 나자빠지기 전 나는 간신히 의자에 몸뚱이를 앉혔다.


게으르며 게으를 것이다, 나태 계명 10장 10절을 읊조리며 노트북을 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색 띠를 두른 커피 잔, 미세한 바다 거품이 암벽에 자국을 남기듯 컵의 내벽을 타고 갈색 점을 남긴 머그잔, 갈색 링을 선명하게 그린 또 다른 머그잔, 굴러다니는 빵 봉지와 과자 부스러기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태초의 내가 되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먹었다. 화석이 된 멸치볶음을 삽질해서 먹거나 쟁여둔 참치 캔을 도구를 이용해서 땄다. 싱크대에 다보탑을 쌓았다.


며칠이 몇 시간처럼 지났다.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집 나간 의식을 강제 소환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배경음악이 구슬피 흘렀다.


나는 노트북 주위에 이중삼중 견고하게 둘러싸인 커피 잔을 주렁주렁 반지를 끼듯 손가락에 끼워 옮겼다. 빵 봉지를 일시에 수거했다. 산산이 흩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청소기로 흡입하고 싱크대에 쌓은 탑을 철거했다. 일상으로의 복귀 명령인 것이다.


어린것들이 짹짹되며 입을 벌리지 않는다면 나는 비와 눈을 가리는 처마 밑에 누워 지나가는 행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숙인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무언지 모를 거룩한 애틋함이, 강한 힘이 나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겼다.


겨우 작심삼일 만이라니. 내게 작심삼일은 쉽지 않았다. 공부, 운동, 취미, 다이어트, 다이어리 쓰기, 수많은 것들이 뜨거운 결심과 함께 작렬이 끝났다. 유일하게, 오래, 꾸준히 한 일은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이었다. 봄직 먹음직한 음식을 지향했고 음식의 온도를 지키기 위해 안달하고 영양 손실을 애달파했다.


물론 지나간 이야기다. 한때 놀아봤다는 사람처럼. 공 좀 차 봤다는 사람처럼, 교문 밖에 줄 좀 세워봤다는 사람처럼 허세 가득한 나의 살림살이 기억이다.


자식들은 자라서 독립했고 나는 더 이상 애써 밥상을 차리지 않는다. 기념할 일이다. 나를 돌보고 마음으로 대접하라는데 그게 참 어렵다. 게으름이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며칠, 몇 시간 주어진 자유에 놀라 뒷걸음치던 내게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졌다. 우왕좌왕 중이다.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이해 못 해 줄 치며 외우는 중이다. 자유를 누리고 게으름을 즐기며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릴 것이다. 무얼 먹을까. 냉장고가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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