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는지
나는 빵이 좋았다. 어떻게 하면 빵을 실컷 먹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흔하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마침내, 결심했다. 빵집 주인과 결혼하기로.
빵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다. 그건 너무 힘들어 보였다. 빵집 주인과 결혼하면 힘들이지 않고 빵을 실컷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술성 풍부한 베짱이가 되어 일하는 남편 남편 옆에서 모차르트 교향곡을 연주하고 윌리엄 워즈워드 시를 읊조리며 마음껏 빵을 먹겠다는 속셈이었다.
야무진 계획은 보란 듯이 어긋났다. 나는 체르니 30번에서 피아노 배우기를 멈췄고, 일기장에 워즈워드의 수선화를 베껴 쓴 이후로 시를 잊었다. 그러므로 나는 빵 만드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다.
빵도둑
빵가게 cctv가 공개되었다. 도둑은 도둑으로서의 직업적 본분, 돈을 훔쳐서 해결해야 할 무언가를 완벽히 잊었다. 빵 하나를 먹기 시작했다. 은밀한 몸속 방아쇠가 당겨졌다. 텅 비었을 동굴 속에 빵 하나가 으깨져 굴러 떨어졌다. 도둑은 자리를 옮겨 유리 진열장 속 케이크를 바라봤다. 하나를 꺼내 천천히 먹었다.
도둑은 자신이 지키려 애썼던 내면의 인내와 절제를 잃었다. 금강산도 도둑질도 식후경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식탐이 아니었다. 그는 진열장을 흩트리며 닥치는 대로 빵을 먹지 않았다. 신중하게 고르고 세심하게 음미했다. cctv를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본 빵집 주인과 경찰은 도둑의 먹방에 넋을 잃었다.
취향 가득한 도둑은 빵과 케이크를 충분히 즐기고 나서야 자신의 본분을 자각했다. 그는 금고에서 돈을 훔쳐 달아났다. 장발장처럼 빵만 훔친 건 아니었다. 빵을 먹은 도둑의 몸과 마음이 순해져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유유히 빵집을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도둑의 마음마저 돌린 빵의 위대함과 순기능, 놀라운 효험을 떠벌일 수 있었을 텐데. 도둑에게 빵은 빵이고 돈은 돈이었다.
책도둑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옛 말이 있다. 책을 훔친다는 것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 배움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니 일반적인 도둑과는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광화문 한복판이순신 장군 옆에 교보문고가 있다. 그곳은 내게 세상에 수많은 책이 있다는 것을, 사람은 명을 다해 죽어도 책은 연년세세 전해진다는 것을, 돈이 있어야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다행한 진리를 알려주었다.
교보문고 입구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문장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사람은 무엇을 만든다. 그 무엇 중에 으뜸은 책이 아닐까. 사람이 만든 책은 힘이 세서 사람을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또한 창업자이자 애서가였던 신용호 회장은 직원들에게 “어린이 고객에게 반말하지 말고, 책 도둑에게 무안 주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책의 놀라운 힘을 알고 읽기를 갈망하지만,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도둑을 향한 따뜻한 이해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꽃도둑
나이가 들면 꽃이 좋아진다더니. 자주 걸음을 멈추고 수줍게 핀 꽃을 본다. 기특하다. 곱다. 얼마 전, ‘꽃 꺾었으니 35만 원 물어내…80대 입주민 신고한 매정한 아파트관리사무소', ‘검찰, 기소유예 처분… 관용이 사라진 사회'라는 제목의 영남일보 칼럼을 읽었다. 80대 입주민이 아파트 화단에 심은 꽃 한 포기를 빼내 갔다고 관리실이 경찰도 부르고 CCTV로 찾아내 벌금을 내라고 했단다.
할머니는 '무혐의'가 아닌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할머니가 뽑아간 꽃은 노란 수선화였다. 물론 할머니의 행동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법대로의 처벌은 과연 온당한가. 칼럼니스트의 꽃을 닮은 제안에 헝클어진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수선화 화분을 선물하는 아파트는 없을까.' 나는 갑작스러운 소란을 겪었을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괜찮으신지. 여전히 그곳에서 안녕하신지.
나무 도둑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주인공 네홀류도프가 농부들을 만났다. 모두 가난하다. 아이들이 모여 마을에서 누가 가장 가난한지 말씨름 중이다. 가난한 사람 밑에 더 가난한 사람, 그 사람 밑에 더 가난한 사람이 줄지어 나온다. 누구는 소가 없고, 누구는 소는 있지만 아이가 다섯이고, 누구는 과부이고, 누구는 남편이 감옥에 갔다.
마지막에 등장한 감옥에 간 남편은 지주 소유의 자작나무 두 그루를 베는 죄를 저질렀다. 남편이 감옥에 가자 아내는 구걸을 시작했다. 아이는 셋이고 할머니는 병신이다. 그러니 가장 가난하다는 아이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남의 나무를 벴으니 나무 도둑인 것이다. 형법상 절도죄이고, 재물 손괴죄이다. 추운 겨울 땔감에 사용하려고 벴는지, 팔아서 밀가루를 샀는지 알 수 없다. 나무 두 그루를 훔치고 감옥에 간 농부는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헌금 도둑
주머니 속 동전을 딸랑거리며 교회로 향했다. 동네에 새로 문을 연 슈퍼마켓을 지나쳐야 했다. 나는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오라는 엄마의 당부보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맛있겠지. 하나 골라. 먹어. 주머니에 돈이 있잖아.
나는 과자를, 친구는 초콜릿을 샀다. 내가 전도한 친구이므로, 나는 친구를 기쁘게 해 줄 성스러운 의무가 있었다. 나와 교회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입증해야 했다. 골목에서 우리는 달콤함을 나눠먹었다. 색소로 물든 달짝지근한 입으로 교회로 향했다. 주머니는 텅 비었고 목사님 말씀은 빨리 끝났다. 복주머니 모양의 자주색 벨벳 헌금함이 파도타기를 하듯 옆에서 옆으로 밀려왔다.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한 손에 헌금함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을 헌금함의 뚫린 구멍에 재빨리 넣었다 뺐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텅 빈 손을. 하나님에게 전해져야 할 돈으로 과자를 사 먹었으니 나는 횡령죄를 저지른 것이다.
빵도둑은 훗날 거리에서 풍기는 익숙한 빵 냄새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과거의 자신과 화해했을까. 어렴풋한 에피소드로 아주 작게 접어 기억 한 구석에 담아두었을까.
책도둑이 선택한 책은 자신을 선택한 도둑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감옥에서 풀려난 농부는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을까. 두 그루의 나무가 가족들을 몹시 불행하고 비참하게 했으므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할머니가 훔친 꽃은 화분에서 잘 자라고 있을까. 혹시 할머니는 더 이상 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까,
헌금 자루에 빈손을 넣은 나는 지금, 여기에서 잘 살고 있는 걸까.
구멍 뚫린 배수관에서 솟는 물에 샤워를 하고 수건을 몸에 두른 체 경찰차를 타는 전지현은 귀여운 도둑이었다. 하고 싶은 건 다하는 허구와 무수한 방해물로 삐걱대는 현실은 다르다. 총알이 비껴가는 법도, 시한폭탄이 주인공의 탈출을 기다리는 법도 없다. 곧이곧대로 한 걸음이다. 빵도둑, 책도둑, 나무도둑, 꽃도둑, 헌금 도둑이 나아갈 한 걸음이, 그럼에도, 새 신을 신은 듯 조금은 가벼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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