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정이 무섭다
밥 뭇나. 밥 묵어라. 잡숴 봐. 밥 한 숟가락 떠. 밥 묵고 가라이. 식사하셨습니까? 밥 먹어래, 배고프다. 뭐 먹을까? 밥 먹으러 가자. 밥 먹어허라, 밥은 먹고 다니니. 배꼽시난게…….
영롱하게 빛나는 말들이다. 추운 겨울 누군가의 속을 데우고, 한여름 열에 지친 몸을 추스른다. 누군가의 헛헛한 속을 돌보고, 남은 하루가 수월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어본다.
밥 뭇나.
나는 밥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좋다. 먹었다거나 아직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순간, 때를 놓치고 먹었다고 둘러대는 순간에도 내 입꼬리는 올라간다. 잘 지어진 밥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그저 인사치레라도 고맙다. 어쩌다 끼니를 놓치거나 맛없는 밥을 먹은 날이면 연인에게 바람맞은 사람처럼 서글퍼진다. 일을 하다가 밥시간이 놓칠 수도, 배가 더부룩해서 한 끼를 건너뛸 때도 있지만 그 한 끼를 기다리던 때라면 아쉬움은 깊다.
그런 날은 유독 사는 게 허허롭고, 몸의 기관들이 헐거워져 덜거덕 거리며 겉돈다. 괜스레 예민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뾰족하다. 행동은 조급하고 별 것 아닌 일로 공격적이다. 하루는 길고 미래는 아득하다.
한 끼를 잘 먹으면 사라진 여유가 나타나 제 몸집을 부풀린다. 당겨진 신경이 느슨해지며 주변 사람에게 하는 전하는 안부가 풍요롭다. 그들이 살만 한지, 긁지 않은 로또에 대한 기대는 여전한지, 창창할 미래는 잘 있는지 궁금하다.
엄마는 '밥 믓나"라는 물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필코 먹였다. 손님의 밥 한 공기가 반쯤 비어갈 때쯤, 엄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툭하고 밥 한 주걱을 더 올렸다. 손님은 아니라고, 배부르다고 팔을 사방으로 휘젓지만 엄마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 아니 뱃속을 꿰뚫는 심령술사가 되어 더 먹으라고, 먹으면 늘어나는 게 위장인데 그깟 거 내가 모를까 보냐며 순순한 수용을 종용했다. 한참 먹을 나이에 그 정도는 먹어야 한다고 우겼고, 돌아서면 배가 꺼지고 돌도 소화시킬 나이라고 확신했고, 먹을 수 있을 때 더 먹어두라고 조언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손님 볼 면목이 없었다. 손님이 돌아간 후 엄마를 탓했다. 제발 그런 매너 없는 행동 좀 하지 말라고. 원하지도 않는데 왜 밥을 더 주느냐, 그건 실례라고,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고. 엄마의 행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온갖 말을 동원했다. 그간 쌓인 답답함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밥 못 먹고사는 사람은 없다. 요새 누가 탄수화물을 무지성으로 먹느냐, 다이어트 중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미국에서는 노 땡큐,라고 하면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옛날 사고방식이다. 고쳐야 한다.
엄마는 손님이 항복을 외칠 때까지 먹였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법이었다. 손님들은 점차 대응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추가 공격이 가해질 조짐이 보이면 빛의 속도로 밥그릇 주변에 가드를 치고, 재빨리 밥그릇을 들고 등을 돌렸다.
딸에게 받은 학습이 점차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손님의 사양을 진심이라 믿고, 과한 권유는 무례라는 생각으로 밥 공격을 포기한 날이면 엄마는 차마 전달되지 못한 마지막 한 숟갈을 떠올리며 긴긴밤 잠들지 못했다.
엄마의 측은지심은 늘 차고 넘쳤다. 엄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반쪽으로 보였다. 툭치면 쓰러질 듯 약해 보였다. 뭐가 그리 안 됐는지, 먹이고 불려야 직성이 풀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이다. 통통해야 예쁜 거다. 삐쩍 마르면 보기 좋지 않다. 더 먹어라. 엄마의 눈이 충분히 건강한 한 명을 조준한다.
엄마의 밥정, 밥정이 무섭다. 어서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