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나를 '픽'한 진짜 이유

강렬한 눈빛에 담긴 진의

by 미진

할머니는 아흔이 넘도록 머리가 검었다. 남들처럼 희게 샜다가 어느 순간 다시 검어졌다. 몸은 꼿꼿하고 하는 일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식사량도 줄지 않아 나는 할머니가 만수무강(萬壽無疆)의 만(萬)을 몸소 실현할 줄 알았다.


할머니는 지인의 칠순이나 팔순 잔치에 다른 손주들을 뒤로하고 나를 데려갔다. 추운 겨울,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내 발걸음이 겅중겅중 리듬을 탔다.


“니는 잘 먹어서 예쁘다.”


할머니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이 얼굴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순둥 한 구석이 있어 주인집 아이들과 금세 어울렸고, 어린것들과도 곧잘 놀아주었다. 덕분에 할머니가 잔칫집에 입 하나를 더 달고 가도 크게 눈총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총명함이 하늘을 찌르던 할머니가 나를 ‘픽’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보내는 강렬한 눈빛에 담긴 진의를 해독했기 때문이다.


주인네가 온갖 솜씨를 다해 차려낸 밥상 앞에 앉으면, 할머니는 어디서고 나를 지켜봤다. 부질없이 생선가시를 바르느라 먹는 일이 지체되면 할머니의 눈이 길게 찌푸려졌고, 고사리나 도라지 같은 나물에 젓가락이 갈라치면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주를 발라 붉은 할머니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나는 재빨리 팔을 쭈욱 뻗어 살이 두툼한 갈비를 집어 들었다. 그제야 할머니의 얼굴이 사르륵 퍼졌다. 할머니는 만족한 듯 옆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 하셔, 성님”


잠시 눈치를 잃고 구운 김이나 김치에 손이 가는 순간, 할머니는 귀신같이 내 등허리를 쿡 찔렀다. 정신 차리라는 신호였다. 그날 이후, 나는 나의 본분을 깨달았다. 집안에서 제일 잘 먹는 녀석인 줄 알고 데려왔는데, 먹는 게 영 시원치 않다는 평은 듣지 말아야 했다. 나는 본전을 뽑을 녀석으로 간택된 셈이었다.


할머니가 더 이상 내게 눈길을 보내지 않을 때까지, 그만하면 잘 먹였다, 안도할 때까지, 나는 성실히 먹고 또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머니는 내 불룩한 배를 흘깃 보고는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연거푸 쓰다듬어 주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속 동호 외할머니에게는 은밀한 간식이 있다.


“따라오니라, 가만히 말하곤 앞장서서 걸어갔다. 광으로 쓰이는 어둑한 방으로 너는 따라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찬장 문을 열 거란 걸, 제사 때 쓰려고 둔 유과와 강정을 꺼낼 거란 걸 너는 알고 있었다.”(p.23)


동호는 형들은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채 유과를 쥐어 찐득해진 손을 바지에 닦고 입가에 묻은 강정 밥풀떼기를 톡톡 털며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훗날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어린 새’ 같은 것이 문득 빠져나가는 것을 동호는 보았다. 그것이 하늘로 훨훨 날아갔을지, 차마 몸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떠돌며 슬퍼하는 자식들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 할머니도 만수무강(萬壽無疆)의 만(萬)을 채우지 못하고 하늘로 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마주한 할머니는 장례식장 영정사진 속에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절을 올린 뒤, 차려진 육개장과 수육을 부지런히 먹었다. 할머니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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