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동화책
여러분의 기억 속 첫 동화책은 무엇인가요?
<타이거 소년> 흑백 전집이 기억 속 저의 첫 동화책입니다.
정글에 버려졌는지, 길을 잃었는지 모를 삐죽 머리 소년이 호랑이 가죽으로 아랫도리 중요 부분만 가린 채 정글을 누비며 용감하게 싸우는 이야기지요.
우리 집에 동화책이 그것도 전집으로 들어오던 날, 기대에 부풀어 펼쳐 든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쪽은 정글과 소년, 다른 한쪽은 글로 꽉 찬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었다. 색연필로 흑백 정글과 소년의 호피 무늬 팬티에 색칠을 할까 망설였지만 어렵게 구한 거라고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그냥 참고 읽었습니다. 먹고살기 힘든 살림살이에 학교 보내고 교과서 사주기도 버거운 부모님은 아마도 이 책을 어디서 얻으셨거나 이사 간 집에 버려진 걸 주워오셨을 겁니다.
첫 동화책에 대한 로망은 이렇게 아쉬움만 남긴 채 끝나고 인어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엄지공주에 대한 갈증과 궁금함은 더해만 갔습니다. tv 만화나 친구 집에 놀러 가 잠깐씩 빌려본 책의 조각조각의 기억들로 겨우 내용을 짜깁기하는 수준이라 지금도 공주들의 얼굴을 보고 맞히라고 하면 영 자신이 없습니다.
주일은 기쁜 날, 딸들에게 허락된 외출 날, 운 좋으면 미국 과자도 먹을 수 있는 교회 가는 날입니다.
그날은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선교사님 사택이 비었으니 거기서 성경공부를 하자며 저와 친구들을 데려가셨습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장미꽃 덩굴이 엉겨 붙어 있는 담장 높은 이층 집입니다. 철 계단을 올라, 사자 얼굴 모양의 문고리를 열면 영화에서나 보던 벽난로가 정면에, 푹신한 벨벳 소파가 가운데 있습니다. 넓은 탁자가 있는 한쪽 서재에서 압도된 마음을 누르고 새삼 얌전히 공과공부를 했습니다. 힐끗힐끗 눈길을 끄는 동화책들,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 선생님은 선교사님이 책을 두고 가셨으니 마음껏 읽어도 된다고 하십니다.
온갖 주문에도 열리지 않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속 동굴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제 마음을 단박에 훔친 건 펼쳐도 펼쳐도 또 펴지는 입체북이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 얼굴이,
다음 장을 넘기면 몸이,
그다음엔 다리가 쭉,
마침내 책 한 권이 다 펼쳐집니다.
눈앞에 나타난 건 바로 소인국에 누워있는 걸리버입니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니?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이 뜨겁습니다.
빨리 일요일이 되기를 바라며 한 주를 보내고
길고 긴 전도사님의 설교를 버티고
오늘도 선생님이 선교사님 사택으로 가기를 기도하며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노아의 방주도 신기방기 했습니다.
좌우로 펼치고,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펼쳐지면
커다란 배가 되고
이곳저곳에 뚫린 창문을 하나씩 열면
동물 암수 한 쌍이 짜잔 하고 나타납니다.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만화 성경 이야기와 몇 권의 팝업북이 다였지만 마른땅 위에 내린 단비처럼 시원했습니다.
시간은 흘러 행정 오류인 게 분명한 아주 먼 중학교로 배정이 되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버스를 타면 시간은 좀 줄지만 정류장도 멀고 가끔 오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다니는 게 싫어 걸어 다녔습니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이게 웬 고생인가 싶었죠.
이른 아침 한참을 가다 보면 학교가 보입니다.
가는 길은 멀고 힘들지만 그 이후에는 꽃길이 펼쳐집니다.
정동 덕수궁을 둘러싼 개나리 가득한 돌담길도, 교정의 아카시아 길도
책벌레 친구와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을 향해 가는 길도 모두 꽃길이었습니다.
처음 간 도서관의 먼지를 진득하게 머금은 쾌쾌한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합니다.
도서 대출증을 만들고 책을 고르고 대출증에 도장을 받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랐고 시야는 맑아졌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광화문 대형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책들로 사방이 둘러싸인 그곳
출입문을 들어서면 휙 하고 밀려오는 독특한 향수 내음
들릴 듯 말 듯 잔잔한 음악
발끝에서 느껴지는 카펫의 부드러움
몇 시간씩 책을 읽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
다들 그렇게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책을 읽습니다.
이곳은 내게 이광수의 유정, 무정, 펄 벅의 대지를 안겨주었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지와 사랑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내가 부잣집 딸이 된 듯한
평범한 내가 그럴듯한 내가 된 듯한
뿌듯함으로
어둠이 짙은 저녁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말수도 줄였지요. 이 충만함이 깨질까 봐.
감사합니다.
엄마가 교회에 데려간 것을
주일학교 선생님이 선교사님 사택이 데려간 것을
가까운 학교를 두고 먼 학교에 배정된 것을
책벌레 친구를 만나서 도서관에 간 것을
학교 근처에 멋진 서점이 있는 것을
딸이 공부 안 하고 밤늦게 돌아다닌 다고 야단치지 않는 부모님을 둔 것을
그리고 칭찬합니다.
광화문 웬디스 햄버거, 시청 앞 롯데리아 밀크셰이크로 유혹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한 나를
김민식 pd님 말씀처럼, “뜻이 없지, 길이 없냐.”
맞습니다.
뜻을 품으니 어느새 길이 열리고 필요가 채워지더군요.
굴러다니는 책 하나 없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내게 하늘에서 박이 터지듯 후두둑 책이 떨어지고
글을 쓰고 싶은 내 앞에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사람과 글을 이어주는 길이 놓이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