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린 닻, 내 덫
내가 내린 닻이, 알고 보니 내 덫이었다.
피할 수 없는 덫, 인간의 덫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시 서성거릴 수 있을 뿐이다.
지독히 무차별적인 팩트 공격이다.
내가 내린 닻이, 알고 보니 내 덫이라니
내가 내린 닻의 무게가 그 육중함이 크게 느껴진다.
박지원의 <산책하는 마음>은
에세이스러운 제목만큼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며 집 주위를 여유롭게 서성인다는 것은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맥락 이전에 삶에 대한 직면과 인정이 있다. 산책은 짐을 챙겨 내가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기껏해야 추리닝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집 주위를 배회하는 것이다. 급한 호출이 있으면 한 시간 내로 뛰어올 수 있고 멀리서 보면 어렴풋이 내가 사는 삶의 터전이 보인다. 내 삶의 경계에서 이탈하지 않으며 곧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하다.
산책은 나의 쉼이며 사수해야 할 분량이다.
뒷산에서 보내는 1시간 30분은 혈관 속 찌꺼기, 감정의 우울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시간이며 회복의 순간이다.
머릿속 열심히라는 모터는 습관적으로 내 발을 빠르게 내딛게 하고 가속도를 붙인다. 이건 아니다. 고장 난 속도를 부여잡는다. 줄여라. 속도를
머리를 들어 저 하늘과 나무를 보라고, 꽃과 눈을 마주치라고 한다. 너그러운 자연은 오늘도 변함없이 너를 바라보고 있는데 너는 어찌 눈길 한 번 주지 안느냐고 브레이크를 건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저 흐드러진 조팝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고 반갑다고 아는 척하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채 빈약하고 초라한
'자아의 감옥'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나에게 매몰되지 말자.
나만을 곱씹는다면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 어딘가에서 미아가 되거나 미궁 속에 빠진다고 한다. 멈추자 더 나가기 전에. 자아의 감옥도 감옥이다. 어딘가에 매인다는 것은 노예 상태와 다르지 않다. 자아에 매인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산책을 통해 경계를 푸는 연습을 한다. 달리기는 그 순간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고, 산책은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과 대화하는 거라고 한다. 나를 둘러싼 경계를 풀고 자연으로 나와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겠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법정 스님 말씀
우리가 무언가를 한참을 바라보면 어느새 그것이 되어버린다. 하나가 된다.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자연의 자식이기에 가능하다는 게 법정 스님의 해석이다.
믿고 싶고 믿어진다.
오늘도 산책을 나간다.
나는 무엇을 바라볼까
그리고 무엇이 될까.
멋지게 하늘로 뻗친 잘생긴 나무를 바라보고 멋지게 하늘로 뻗친 잘생긴 나무가 되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