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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익은 호박 Apr 21. 2021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노바디가되어야 한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대학교 2학년 무렵, 여행사 광고지를 학교 게시판에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싸게 유럽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친구 연아는 그것을 해서 유럽여행을 갔고 나는 하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즈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연아는 내게 손바닥만 한 베를린 장벽 조각을 기념품으로 주었다. 지금도 친정집 어딘가에 있을 그 돌덩어리를 생각하면 선택하지 않은 자가 겪는 후회와 미련이 있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은 여전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to-do-list의 한 줄이다. 기필코 완수의 날이 오기를.

읽기를 끝낸 책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몇 자 적는다. 기록되지 않은 책들은 계속 주변을 맴돌며 말을 걸어 산란하다.

김영하 작가님의 글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다분히 건조하게 느껴지는 정서, 적당한 선에서 절충되는 시크함이 멋지다. 


여행은 결국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기대했던 것이 아닌 기대하지 않은 다른 것을 얻어 돌아온다. 기대했던 것에 실망하고 대신 다른 어떤 것을 얻는 과정 속에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적이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 예전에 남대문을 안 가본 지방 사람이 서울에서 남대문을 본 사람의 말을 거짓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여행을 떠난 여행자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간다. 과거에 대한 믿음은 수정된다. 열린 마음이 되는 것이다.

철학자 카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끝없이 떠난다. 직접 내 몸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인류의 진화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린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이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왕복 티켓을 산다. 우리는 그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으려고 떠난다. 낯선 곳에서 때로는 노바디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이며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지구를 횡단하고 싶은 열망을 품은 여행자, 야생을 사랑하는 방랑자의 습성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필요와 일이 합쳐져 다닌 여행 경험을 토대로 얻은 나름의 사유를 정리한 글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여행을 다룬 글임에도 그가 다닌 어떤 여행지가 떠오르기보다는 그의 서재가 더 자주 머릿속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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