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소나기
장롱면허 10년 차이던 어느 날, 영어 유치원 동료인 클레어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에린 선생님, 혹시 제가 쓰던 차, 필요하시면 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저야 정말 감사하죠. 선생님, 새 차 사시는구나. 축하드려요.” 오랜 뚜벅이 생활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하면서도 운전면허를 딴 후 한 번도 혼자서 차를 몰아본 적이 없어 내심 걱정이 앞섰다.
서둘러 퇴근을 해도 유치원이 있는 용인 수지에서 구성으로 가는 버스는 단 한 대뿐이고 이것도 한번 놓치면 30~40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먼저 퇴근한 내가 여전히 정류장에 서있는 모습을 몇 차례 본 클레어 선생님은 차를 바꾸면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며칠 뒤 선생님은 남편분과 함께 내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놓고 가셨다. 다음날 출근해보니 책상 위에 자동차 키와 장문의 편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이 차를 구입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점검 날짜, 부품 교체일, 소소한 사용 팁 그리고 이 차를 내게 줄 수 있어 안심이라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자상할 수 있을까’ 사랑과 배려를 온몸으로 받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운동신경 이 둔하고 덜렁대는 내가 운전하는 것을 못 미더워했다. 더군다나 개구쟁이 남자아이 둘을 태우고 운전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어했다. 부부간에 운전 연수해 주는 거 아니라더니 딱 한 번 시내 연수를 해준 후로는 더 완고히 반대를 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연습하면 잘할 수 있다’라는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드디어, 마침내, 결국 핸들을 잡게 되었다.
D-day이다.
목표는 전철역 근처 마트 지상 주차장까지 안전 운전하기이다.
그래, 가보는 거야. 까짓.
시동을 걸기 전 경건한 기도를 드렸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peace"를 외치며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매일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지만 그날만은 새로웠다. 점차 안정감을 되찾았다. 불안감은 서서히 엷어지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조만간 운전 중 음악을 틀 수도, 잘하면 에어컨 켜기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출퇴근 시간을 피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마트의 주차장엔 차들이 많지 않았다. 얼굴을 내밀고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며 비교적 괜찮게 주차를 했다.(당시엔 후방 카메라가 없었음.^^) ‘처음엔 다 이렇게 하는 거잖아. 할 만한 걸.’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강한 소나기가 몰아쳤다. 둑이 무너진 듯 많은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 되어 마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선생님이 주신 노트의 내용을 떠올려 와이퍼를 작동했다. 웬걸, 몇 번 움직이더니 와이퍼가 멈춰버렸다. 다시 작동을 해봐도 꼼짝하지 않았다. 비는 사방에서 몰아쳤고 시야는 완전히 가려졌다. 마치 자동 기계식 세차장 속에 갇혀서 세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로 한복판에서 비상등을 켜고 멈춘 듯 기어가는 상황이었다. 일단 도로에서 나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자동차 정비소 앞에 차를 멈췄다. 클레어 선생님께 전화를 하고 사용법을 들었다. 설명대로 해봐도 멈춰 선 와이퍼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잘 못 만진 건가.’ 전화를 끊고 정비소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꼼짝 않던 와이퍼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소나기는 수그러들었고 와이퍼 덕분에 시야는 확보되었다. 물 대포를 맞으며 목숨을 걸고 드라마 한 편을 찍은 주인공이 되었다.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전쟁터에서 살아난 거였다. ‘남편 말이 맞아. 난 안 돼. 운전을 하면 매번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게 되는 건가.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자신감을 꼭 부여잡고 ‘겨우 첫날’이었음을 되뇌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집에 돌아왔다.
운전 첫날, 난이도 ‘상’의 테스트를 통과해서인지 그 후로 나의 운전은 비교적 무난했다. 이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주변 사람들은 '무난'은 지나친 미화라고 절대 무난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암튼 폭우 속에서 보낸 짧지만 길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픽하고 웃음이 난다.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선 차를 알아서 피해 준 그때 그곳을 지난 모든 운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워준 나 자신에게도 ‘나름 애썼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초보운전 실수담을 말할 때 나는 첫 출산 이야기보다 더 할 말이 많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그렇게 대하 전쟁 서사극으로 둔갑시킨다던데 나 또한 그에 못지않은 무용담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