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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익은 호박 Jun 25. 2021

복숭아 한 입과 친구 미정이

여름방학의 단상

복슬복슬 복숭아가 맛있다.

통통한 아기 엉덩이 같기도, 가득 채운  아이스크림 두 스쿱 같기도 한 복숭아를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과즙을 잔뜩 머금은 새콤달콤한 복숭아는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사르르 고인다. 백도, 홍도, 천도복숭아, 종류도 맛도 식감도 제각각이다. 이 맛있는 복숭아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여름 방학이 왔다. 아버지의 삼촌이 사시는 경기도 부천의 소사마을,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 외곽 도시가 되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만 해도 복숭아가 특산물인 시골마을이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소사의 삼촌댁에 가셨다. 고속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터미널에서부터 뭉근하게 거름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농촌 경험이 없는 내게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였다. "이 냄새가 얼마나 귀할 건 줄 아니. 천연 거름이야. 식물과 동물을 살찌우지. 금방 괜찮아진다."라고 하셨다. 숙모가 마루에 정성껏 점심밥을 차려주셨다. 여물을 질겅이다 눈을 껌뻑이는 소 몇 마리가 마당 한쪽에 있다. 그 마구간 앞에서 밥을 먹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꾸역꾸역 밥알을 넘겨보지만 시골의 냄새가 미각을 마비시켰는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잠시 후 동갑내기 사촌인 미정이가 왔다. 구세주가 나타난 거다. 미정이 방에 들어가 그동안 학교 앞 팬시 문구점에서 사 모은 예쁜 편지지와 메모지를 선물로 주며 우정을 나누었다.


“얘들아 복숭아 따러 가자.” 

“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다. 이쁜이들이 얼마나 열렸을까.” 허겁지겁 숙모를 따라나섰다. 미정이는 흥분한 내가 재밌기만 하다. “그렇게 좋아?”  "그럼" 복숭아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달게 졸여지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 하나를 골라  물이 담긴 대야에 복슬복슬 벨벳 같은 복숭아를 닦아 게 눈 감추듯 먹었다. 내 주먹보다 큰 녀석이었다. 하나만 먹어도 배부른 내가 아쉬웠다. 복숭아를 담고 옮기고 열심히 숙모를 도왔다. 마음 한켠에는 내일 갈 때 많이 싸주셨으면 하는 얕은 속셈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복숭아를 먹을 때는 내가 싫어하던 거름 냄새, 소똥 냄새, 그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적응했나? 냄새의 강도가 반의반으로 줄어든 듯했다.

pixabay

귀뚜라미가 우는 밤, 미정이 방에는 온갖 이야기가 별처럼 쏟아졌다. “그만 떠들고 자라"라는 숙모의 말씀에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누워 해결되지 않는 학교, 친구 고민을 나누고 그동안 읽은 하이틴 로맨스를 공유하고 Freedom, Wake me up before you go go를 부른 인기 팝가수 웸(Wham)을 찬미했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이유로 자주 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매번 짧게 만나 매번 아쉬웠다. 헤어지기 싫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하루만 더 있자고 아버지에게 떼를 써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미진이 줄 생각에 복숭아 농사를 짓나보다." 숙모는 노끈을 꼬아 만든 손잡이가 달린 묵직한 복숭아 상자를 내미셨다. 집에 계신 엄마도 이 맛있는 복숭아를 맛보시겠구나 생각하니 설렜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미정이와는 아쉽지만 내년 여름을 기약했다. 싱그러운 복숭아 한입과 친구 미정이가 있는 그해 여름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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