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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익은 호박 May 12. 2021

김훈, 남한산성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김훈 작가의 책은 따뜻하다.

칼의 노래에서 그랬고 이 책, <남한산성>에서도 그랬다.

춥고 잔인한 겨울,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잡아먹는 겨울,  꽁꽁 얼어붙은 냉골 같은 손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심장을 가진 인간을 뜨겁게 쓸어주는 작가의 글은 또 역사의 한 굽이를 힘겹게 넘게 한다. 역사 책에서 울분에 차 보았던 삼전도 굴욕을, 주전론과 주화론의 말말말을, 명분과 실리의 첨예한 갈등을 한 폭의 수채화로 적셨다. 이 글은 인조의 관점도,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신료의 관점도, 대장장이 서날쇠의 관점도 아니다. 극한의 상황은 모두를 같은 일직선상에 서게 했다.             

겨울이다.


가자. 나는 인간이므로, 나는 살아 있으므로,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 적들이 성을 둘러싸도 뚫고 들어갈 구멍은 있을 것이다. 가자, 남한산성으로 가자.

김상헌의 몸속에서 울음은 그렇게 울려 나왔다.


추운 겨울,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간다. 청의 군대는 성벽 둘레의 마른 풀을 모두 불 질러버렸다. 굶주린 말들은 눈을 헤치고 땅속에서 풀냄새를 더듬었다. 아직 봄은 멀었다. 남한산성에서 보낸 겨울과 봄은 슬픔이고 애통함이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이 첩첩산중의 상황에서 그들의 언설은 불길같이 강렬하게 일었다. 그 시대에 이렇게 언로가 열려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신하들이 찬 마루에 머리를 조아리고 왕에게 드리는 한마디 한마디는 이미 목숨 따위는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왕은 통곡 속에서도 찬 마루에서 떨고 있는 신하들을 가엽게 여겼다. 메어지는 슬픔이다.


최명길이 울었다.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 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 날을 여소서.

왕에게는 더 이상의 길이 없었다. 청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청의 칸은 화친을 반대한 무리들을 바치게 하였다. 30살, 29살의 당하관인 윤집, 오달제가 자청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술을 따르며 숨죽여 울었다. "신들이 먼저 나가서 전하의 길을 열겠사오니, 전하께서는 신의 뒤를 따라서 삼전도로..... 임금이 쓰러져 오열했다."


왕은 마침내 남한산성을 나갔다. 창고에는 닷새 치의 군량과 밴댕이젓 한 항아리가 남아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목숨을 걸고 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대장장이 서날쇠가 비극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가올 미래에 밝은 빛을 던진다.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불길이 끊긴 화덕이 썰렁했고, 오소리가 굴을 뚫었다. 서날쇠는 진흙을 이겨서 화덕 안쪽의 구멍을 막았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 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남겨진 백성들은 무너져버린 조선을 일으켜 세운다.  죽음의 겨울, 병자년의 밤은 그렇게 지났다.  봄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 씨를 뿌리고 거둘 것이다. 배불리 먹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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