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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l 02. 2021

받아쓰기 30점, 설마?

여름방학, 일기가 숙제라니

초등 2학년 아이의 일기를 통해 본  어설픈 엄마의 고군분투기를 살짝 공개합니다.

받아쓰기 30점, 설마 했다. 

짧은 일정으로 예정된 미국 생활을 즐기며 한국에서 챙겨간 학습지와 동화책들은 트렁크에서 까맣게 잊혔다. 미국 유치원과 초등 1학년 내내 신나게 놀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재에 충실하기로. ‘우리말 걱정은 한국에서’라는 마음이었다. 조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원의 집 아이들처럼 자연과 물아 일치의 여유를 체득한 아이들이 한국의 스피디한 학습과 경쟁에 잘 적응할지 걱정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해 집을 얻고 근처의 초등학교에 입학 신청을 했다. 


첫날이다.

가방 속 무제 노트를 펼쳐보니 받아쓰기가 30점이다. 굳이 첫날, 즐겁기만 했으면 좋았을 날,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는 아니었으나 그게 좀 빨랐다. 점수와 무관하게 아이는 밝았고 학교생활을 즐거워했다. 자신과 똑 닮은 아이들로 둘러싸인 모국에서 안도감과 익숙함을 느꼈으리라. 방과 후 반 친구들과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자신의 비장의 무기인 태권도 실력을 뽐내기 위해 친구들이 다니는 태권도장의 이름도 알아뒀다. 

당장 태권도를 배우겠다는 아이,

30점이라는 점수에 망연자실한 엄마,

손으로는 간식을 챙겼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꽤나 섬세한 촉수를 지닌 맑은 영혼이기에 엄마의 어설픈 연기에서 다른 기운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태권도 계속해야지. 아빠랑 의논하고 내일 태권도장에도 가보자.”

분리수거 날이었다. “혹시 새로 전학 온 아이의 어머니세요? 저 2층 살아요.” “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6년 살다 지난달에 들어왔다는 그녀는  그동안 모은 지역, 학교, 담임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시원스레 풀어주었다. “어쩜 이런 소식을 다 아세요. 한 달 먼저 오셨다면서요.” 그녀는 사거리 학원가에서 학원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엄마들과의 상담을 통해 학교 정보를 많이 알게 됐다고 했다.

그녀는 다음 날 오전 티타임에 나를 초대했고 나는 준비한 쿠키세트를 들고 방문했다. 거실에는 그녀의 딸이 받은  글짓기 상장이 걸려 있었다. 받아쓰기의 문턱에서 헤매는 아들을 생각하니 놀라웠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두 가지 언어를 고루 학습하게 했고 특히 집에서는 한글 동화책을 많이 읽혔다고 했다. “그럼 받아쓰기는 너무 쉽겠네요.” “늘 100점인데 그게 중요한가요. 2학기부터 영재 과학반에 보내려고요. 아이가 실험하고 보고서 쓰는 걸 좋아해서요.”

받침 있는 단어부터 상당한 난이도의 차이를 느끼는 아이, 

빨간 색연필로 채점된 받아쓰기 공책을 보면 상기되는 엄마,

저녁 식사 후 한글 완전 정복을 위한 집중 학습에 돌입했다. 새 학교에 적응하며 한 시간가량 태권도장에서 뛰놀다 온 아이의 눈꺼풀은 스르르 감겼다. 효율이라고는 0%였다. 10분만 하자고 달래다 보면 목소리가 어느새 담장을 넘었다. 아이는 질질 짜다 하품을 하다 질질 짰다.


여름방학이 왔다. 드디어 지리한 받아쓰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우리 앞에는 일기장이 놓였다. 다행히 그림일기장이었다. ‘할 만하겠는걸.‘ 그러나 아이는 한 줄 쓰는 것도 버거워했다. 어떻게 시작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승윤이 오늘 뭐 했더라.” “피자 먹었지.” “피자가 어떻게 생겼지. 피자 위에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 봐.”

                                                  일기 1

엄마가 피자를 만들어주셨다. 동그라미 피자에는 분홍색 햄, 소시지, 노란색 파인애플, 하얀 양파 

그리고 우유색 치즈 그리고 빨간색 토마토케첩이 있었다. 동생 승민이와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동안 익힌 단어를 최대한 활용하고 모르는 단어는 단어 카드를 찾아가며 썼다. 내가 중간중간 해준 말은 “또 뭐가 있었더라, 또, 또”였다. 

                                                  일기 2

외할머니가 잡채를 만들어주셨다. 맛있는 잡채에는 초록색 시금치. 주황색 당근, 초록색 피망, 노란색 계란, 하얀색 양파 그리고 고기가 들어있다. 동생 승민이와 함께 먹었다. 정말 최고였다

이날도 내가 해준 말은 “또, 또. 또”였다. 기억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아이는 낮의 기억을 되살렸다.

                                                    


                                                 일기 10

엄마가 가방이 무겁다고 하셨다. 내 가방에는 국어책, 국어 익힘책, 수학, 수학 익힘책, 사회, 과학, 공책, 알림장, 필통, 풀 그리고 걸레가 있다. 가방이 무거우면 키가 크지 않는다. 앞으로 사물함에 

두고 다녀야겠다. 나는 키가 더 크고 싶다.

점차 일기 쓰기가 제일 쉬운 아이가 되었다. 한동안 단어의 나열 방식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아직 단문의 명확성, 가독성 등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pexels

2층 여자를 보며 불타는 라이벌 의식에 사로잡혀 잠에 취한 아이를 붙들고 공부를 시키고 각종 대회에 도전도 하지 않고 포기한다고 아이의 소극적 태도를 나무라던 나는 질투의 늪에서 벗어났다. 다른 집 아이가 3, 4학년 아이들과 과학 영재반에서 영재성을 키워나가든 각종 교내 경시대회에서 상을 휩쓸던 무덤덤해졌다. 한글 동화책을 낄낄거리며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지체 없이 승윤체로 휘날리는 아들이 더없이 흐뭇하기만 했다. 

첫째 아이는 부모의 시행착오의 산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더니 내가 그랬다. 또 다른 나로 착각했다. 나의 원시적인 모습을 가장 많이 본 아이, 지금은 엄마보다 더 넓은 품으로 주변을 감싸는 아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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