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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08. 2018

정신을 위한 재활치료(2)

'리틀 포레스트' 보고 연습하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거나 없을 때 모두)


준비물: 종이, 연필이나 볼펜 (노트북도 괜찮아요)



나 또한 이 땅에서 자란 작물이라는 것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밭에서 키우는 토마토나 감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어떤 땅에서 비바람을 맞고 자란 하나의 작물이다.  나는 어떤 햇빛을 받고 자랐을까?  내가 만난 비바람은 어떤 것이었지?  내가 자란 땅의 양분은 달고 맛있었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보는 연습을 할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음료 한 잔 시켜놓고 글을 쓰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도 좋다.  앞으로 이런 식의 연습을 자주 하게 될지도 모르니, 텐바이텐이나 아트박스 같은 곳에 가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호화찬란한 공책을 하나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매장을 찾아가는 동안 걷고 바깥 바람 쐬면서 건강해지는 건 덤:)


  나는 음식, 놀이, 학교라는 세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한다.  어떤 식인지 대충 한번 훑어보고 자기만의 기억을 떠올려서 쓰면 된다.  감정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억나는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쓰는 게 더 도움된다.




(1) 음식


  내가 아주 아기일 때는 오렌지 주스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어느날 손바닥이 노래져서 엄마는 황달인 줄 알고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고 한다.  결과는 오렌지 주스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믿거나 말거나.  지금도 귤이나 오렌지, 한라봉같은 과일들을 아주 좋아하고, 힘들 때는 오렌지주스를 마시게 된다.  


  나는 어릴 때 신토불이형 입맛이었다.  '신토불이'라는 단어가 그때 유행했는데, 우리 땅에서 난 제철음식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내용의 신토불이 동화책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콩 종류를 굉장히 좋아했다.  검은 콩, 붉은 강낭콩, 완두콩... 모두 좋았다.  그래서 엄마는 간식 대신 콩밥의 콩만을 떠내서 주황색, 빨강색의 얇은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주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 콩을 먹었다.  청국장이나 된장도 콩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듣고는 그 어린 나이에도 청국장을 끝까지 긁어먹곤 했다.  콩떡도 좋아했고.


  마늘도 좋아했다.  엄마가 하는 잡채는 고기와 야채를 볶고 거기다 당면을 넣고 간장 소스를 넣어서 볶는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거기 마늘쪽도 들어갔다.  나는 잡채의 구운 마늘쪽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가 마늘만 따로 볶아주신 적이 있는데 그건 맛이 별로였다.  어느날 엄마가 마늘을 얇게 잘라서 구워주셨는데 잠깐 외출한 사이에 쥐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마늘은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아마도 사실이라기보다는 어릴 때의 내 상상이 가미된 기억일듯.


  장아찌도 좋아했다.  깨와 참기름에 그냥 버무리는 것과 고추장을 섞어서 버무리는 것, 두 종류가 있었는데 어느 쪽이나 다 맛있었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도 내가 장아찌를 좋아한다는 걸 아셔서 항상 장아찌를 준비해두셨다.  외갓집에 가면 밤에는 떡국떡이 든 라면도 먹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두부도 좋아했다.  그때는 두부장사하는 아저씨가 골목을 돌아다니곤 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두부장사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의 트럭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가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밖으로 나가서 따끈한 두부를 사다가 얇게 썰고, 양념장을 만들어주셨다.  그러면 양념장을 얹어서 두부를 먹었다.  따뜻한 두부라 양념장만 얹어 먹어도 정말 맛있었다.


  겨울에는 구운 떡을 좋아했다.  엄마는 항상 책을 읽거나 뭘 쓰거나 하셨다.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엄마 옆에서 엄마를 따라서 뭘 읽거나 쓰거나 하는 흉내를 냈다.  겨울에는 그러다가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엄마가 옛날 도시락통을 꺼내서 외갓집에서 가져온 쑥떡이나 콩떡을 구워주셨다.  후라이팬에 구운 것보다 옛날식 도시락통에 넣고 구운 떡이 훨씬 맛있었다.  엄마는 겨울에 식혜도 직접 만드셨다.  아들 굶어죽을까봐 신혼 첫날부터 찾아와 엄마에게 특별 요리 훈련을 하셨다는 극성스러운 할머니 덕에 우리 엄마는 식혜 만드는 법도 배웠다고 한다.  '엿질금'이라는 뭔가 매혹적인 단어, 식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흰 천으로 뭔가를 거르고 짜내는 것, 그때 흘러나오는 흰 액체와 그 달달하고 구수한 냄새...... 그런 것들이 기억난다.  아무튼 엄마가 만든 식혜와 엄마가 구워준 떡을 먹으면서 책을 봤다.  그때 봤던 동화책 중에는 도깨비가 잠든 사이에 도깨비가 구워놓은 떡을 훔쳐먹고 도깨비가 해놓은 식혜를 훔쳐마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책을 보면서 식혜와 떡을 맛있게 먹었다.


  딸기 아이스크림에 꽂혀서 작은 김치통만한 딸기 아이스크림을 사다놓고 온 식구가 퍼먹은 해도 있었다.  그 해엔 아빠랑 엄마는 삼국지에 꽂혀 있었다.  아빠, 엄마는 어른용 삼국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린이용 삼국지를 읽으면서 딸기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었다.  


  수수팥단지.  할머니가 엄마한테 수수팥단지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10살 될 때까지 생일날 수수팥단지를 해주면 애가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했다고 한다.  영아사망률이 높던 시절의 비책이었을 것이다.  요즘 신생아 사망사건이나 각종 사고들을 보면 꼭 옛날 이야기같지만은 않지만.  엄마는 10살까지 해주려고 잘 보고 배워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 생일이면, 방의 한쪽 벽 밑에 수수팥단지와 미역국을 놓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를 했다.  수수팥단지는 곡물가루의 부드러운 고소함, 약간의 짭짤함이 섞인듯한 묘한 맛이었는데 맛있었다.


  내가 피자를 처음 먹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 이전까지는 피자를 싫어했다.  피자 도우 부분만 조금 먹을 뿐 피자 토핑은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좋아하게 됐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까다로웠다.  일본 동화 중에 피자 맛에 반해서 피자 굽는 연습을 몰래 하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피자 맛을 처음 알게 될 때의 느낌과 내가 처음 피자 맛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 뭔가 비슷해서 생각이 난다.  피자를 좋아하게 된 이후부터는 영어학원에 가기 전에 엄마가 피자헛에서 조각피자를 사주시곤 했다.  일요일마다 엄마, 아빠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같이 피자를 먹기도 했다.


  피자의 재료인 토마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였다.  (과일이 아니라니... 흑흑...) 여름에 검은 비닐봉지 한 가득 토마토를 사다놓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리기도 했다.  아빠는 토마토를 잘라서 설탕을 살짝 쳐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것을 가장 좋아했는데, 나는 날 토마토가 좋았다.  동화책을 읽으면서 토마토를 먹으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토마토 꼭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러 가야되는게 가장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동화책 갈피에 토마토 꼭지 부분(알뜰하게 갉아먹고 풀만 남은)을 넣어놓기도 했다......-_-  어떤 의미에서는 책을 더럽히는 거니 뭐라 할만도 한데 우리 엄마, 아빠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니 책이니 니가 알아서 해라 라는 태도.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유치원 때 좋아했던 간식은 마가렛트였다.  유치원을 한번 옮겼었는데, 그 이전 유치원에서는 주지 않았던 마가렛트를 새 유치원에서는 줬다.  요구르트랑 같이.  엄마, 아빠가 과자를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라 집에서도 과자를 먹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유치원에서 처음 먹어본 마가렛트는 신세계였다.  유치원에 가기 싫은 날도 그거 먹으러 갔던 것 같은 생각이 살짝 든다.   


  새콤달콤도 좋아했다.  내가 좋아했던 건 포도맛, 딸기맛.  다른 맛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복숭아맛 같은 건 그닥이었다.  새콤달콤에는 마이쮸와 다른 뭔가 진한 맛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 때는 새콤달콤을 먹는다.  새콤달콤 포도맛이 중간에 맛이 한번 변했는지...... 어릴 때는 그냥 포도맛이었는데 중간에 맛이 청포도처럼 변해서 한동안 안 먹다가 지금은 다시 먹는다.  지금은 딸기맛이 더 좋다.


  나는 어릴 때 편식쟁이였다.  신토불이형 음식은 다 좋아했는데 고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닭은 좋아했는데 고기는 거의 먹지 않았다.  삼겹살의 기름부분, 물컹한 그 느낌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그건 엄마 식성 닮았다고 한다.  엄마도 기름 부분은 싫어하고 살코기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 식성을 굉장히 배려해줘서 곰국을 먹어도 고기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게 체에 받혀서 주고, 기름 있는 부위를 다 떼어낸 고기만을 주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큰집에 갔는데 엄마는 바쁘고 아빠가 나에게 고기를 준 적이 있다.  구운 삼겹살을 한번 먹어보라고 줬는데 물컹해서 결국 뱉어버렸다.  다른 집 같았으면 엄청 혼났을 것 같지만 우리 집은 이런 문제도 자유로웠다.  그냥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 좋아하는 부위로 먹으면 된다...... 이게 우리 부모님의 철학이었다.  자식을 손님처럼 대접하는 부모랄까.  그게 단점도 되긴 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는 편식을 하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중에 다 고쳤다.  고치는게 딱히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에 와서 친구들이랑 고깃집에 갔는데, 그때 '한번 맛있게 먹어보자'라고 생각하고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맛있었다.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다 먹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게 고기라는 거.



  

(2) 놀이


  어릴 때 나는 아침에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서 엄마를 깨우지도 않고 옆에서 혼자 조용히 놀고 있었다고 한다.  조금 더 커서도 그런 스타일이었다.  명절 때 큰집에 가면 성묘 다녀와서 다들 낮잠을 자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자는 척 하다가 혼자 나와서 큰집 탐색을 하러 다녔다.  사슴 박제도 구경하고 그 옆에 놓여있었던 나무 테두리가 달린 큰 안마 의자에도 앉아보고 신기하게 생긴 모양의 돌과 그 밑에 깔아놓은 작은 조약돌들도 만져보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도 올라갔다.  사촌 오빠들 방에 들어가서 서랍을 열어보기도 하고 2층에 있던 작은 정원에도 나가서 돌의자에도 앉아있고, 물이 흘러나오는 물레방아 모형도 돌려보고 했었다.  낯선 곳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좀 좋아해서 큰집 근처의 가게에 가서 방향제를 사서 돌아오거나 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외갓집에 놀러가서도 비슷하게 놀았다.  외갓집에는 사촌동생들이 많아서 다들 데리고 가긴 했지만 어딘가를 어른들 몰래 조용히 탐색하면서 다니는 스타일은 똑같았다.  외갓집 근처에는 곧 아파트가 지어진다고 해서 다들 떠난 빈 집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위험한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사촌동생들하고 같이 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했다.  빈 집들은 대부분 벽이 헐려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좀 있었다.  투명 플라스틱 액자 여러 개를 줄로 묶어서 벽에 걸게 되어있는 것도 있었는데 가족 사진이 들어있었다.  소주병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외갓집에 가면 동네 어른들이 꽤 있었다.  어른들은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쟤는 누구네 서울 큰 손녀야'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다들 신원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넘치는 곳은 아니라서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애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어느 집 손자들인지 다 알고 있었다.  외갓집으로 올라가기 전 길목에 슈퍼가 하나 있었다.  약간 곰팡이 냄새? 간장 냄새 같은 게 나던 곳이었는데 거기서 스케치북도 팔았다.  엄마는 외갓집으로 가기 전에 슈퍼에 들러서 나에게 과자를 사주기도 했고(지금은 단종된 과자인데 베이커리에서 파는 과자 수준으로 맛있었다.  다시 못 먹는게 아쉽다.) 스케치북을 사주기도 했다.  그때는 그림그리는 걸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어딜 가든 스케치북은 필수였다.   


  외갓집은 한옥과 양옥의 중간쯤 되는 집이었는데, 은근히 구조가 요상, 복잡해서 탐색하기 좋은 곳이었다.  외갓집 마당에는 나를 비롯해서 다섯 명이나 되는 손자들이 여름이면 큰 대야에 담겨 물놀이를 했던 수돗가가 있었다.  수돗가 옆으로는 녹이 슬고 약해보이는 철제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으로 올라가면 작은 옥상 텃밭이 있었다.  옥상 텃밭 밑에는 벽을 타일로 바른 창고가 있었다.  어른들은 위험하다고 그 계단을 못 올라가게 했는데, 애들은 당연히 열심히 올라다녔다.  그리고 집에는 마루를 통해서 뒷뜰로 가는 길, 집과 담벼락 사이의 좁은 길로 뒷뜰로 가는 길, 이렇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담벼락 길은 어둡고 좁아서 귀신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마루를 통해서 뒷뜰로 가는 길은 보통 마루 중간에 문이 닫혀있어서 막혀있었다.  마루에는 할아버지가 수집한 컵이나 책, 장식품 같은 것들이 유리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해마다 할아버지에게 보냈던 선물들도 있었다.  그 양쪽으로는 방들이 있었고, 마루를 좀더 들어가면 뒤에도 방들이 몇 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엄마가 쓰던 방이라고 했다.  사람이 쓰지 않아서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재밌는 물건들이 많아서 그 방에도 자주 갔다.  


  뒷뜰에는 포도나무가 있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만들어내는 그런 나무는 아니었고 조금 작은 편이었다.  엄마가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심은 거라고 했다.  그래도 그 포도에서는 포도송이들이 열려서 여름에는 그걸 따먹곤 했다.  포도는 엄청 단 맛이 난 건 아니고, 은은하고 싱싱한 단맛에 가까웠다.  그리고 흙밭이 좀 있었는데 아마 김장독 묻는 곳이 아니었나 싶다.  사촌동생들하고 나는 거기서 개미도 잡고 소꿉놀이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다락도 있었다.  안방의 벽에 내장된 옷장(어릴 때는 여기도 많이 들어가서 숨바꼭질을 했다) 바로 옆에는 벽에 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문은 거의 닫혀있고 먼지 많다고 올라가지 말라는 소리를 항상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올라갔다.  다락방은 의외로 천장이 굉장히 높았고 계단으로 올라다녀야 될 정도로 컸다.  그 다락방은 부엌의 천장 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거기서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 인형을 발견해서 한동안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는 보통 인형놀이를 하고 놀았다.  어릴 때 아빠는 씩씩해야 된다고 자주 그러셔서 나는 원하지도 않는 로봇들을 사달라고 해서 일부러 갖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제일 좋아했던 건 바비인형들이었다.  인형이 10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애꾸눈 해적을 만들겠다고 인형의 한쪽 눈에 검은 마카로 안대를 그리고, 미용실 놀이를 하면서 인형의 머리카락도 많이 잘랐다.  인형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겠다고 인형 눈 부분을 바늘로 뚫어서-_- 인형 머리 안에 물을 채워넣고 구멍으로 눈물이 나오게 한 적도 있다.  인형 드레스랑 왕관도 많이 모았다.  고대 이집트 책에 한창 빠져있을 때는 이집트 미라 놀이도 많이 했다.  인형을 깨끗하게 씻기고 향수 뿌리고 온 몸을 붕대로 칭칭 감아놓고 관에 넣어주는 놀이도 많이 했고, 어떤 동화책에서 이집트 공주의 미라의 발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어떤 사람이 그 발의 주인인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게 꿈이었다는 내용을 읽고는 인형의 발을 잘라서 그 놀이를 하기도 했다......-_-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그 단편소설을 다시 읽은 적이 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엄마가 나중에 그때 걱정을 많이 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인형 눈을 찌르고 발도 자르고 이러고 노니까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분노가 가득 차 있는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인형놀이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나는 재우면 눈을 감거나 배고프면 울거나 세우면 눈을 뜨는 아기 인형들은 오히려 좋아하지 않았다.  아기 인형을 데리고 할 수 있는 건 엄마 놀이밖에 없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엄마 놀이가 아니었다.  나는 책에서 본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들을 인형으로 실현하는 놀이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비 인형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스토리상 필요한데 바비 인형 소품으로는 나오지 않는 물건들은 지우개나 지점토 같은 것으로 스스로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면서 놀이를 계속했다.


  항상 집에서만 놀았던 것은 아니다.  매일 놀이터에 나가서 동네 또래들하고도 하루종일 놀다 들어오고 혼자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학원에 다니는게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라 (그건 아닌 거 같고 그 당시에도 친구들은 학원에 매일같이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는 학원을 특별히 보내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학교가 집에서 좀 멀었기 때문에 주로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는게 아니라서 친구들이 학원가는 걸 나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듯......) 학교가 끝나면 바로 놀이터로 달려가곤 했다.  놀이터에는 또래 친구들이 항상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서 나도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바비인형이 그려진, 온통 연분홍색과 연보라색으로 도배된 네발 자전거를 사주셨다.  뒤에 두 개의 보조바퀴가 달려있어서 자전거 타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게 가장 시원했는데 한번은 내리막길에서 조절을 잘 못해서 벽에 그대로 들이받은 적이 있었다.  엄청 아팠다.  그래도 집에 와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피가 나거나 다친 것도 아니었고.  다행히 자전거도 무사했다.  그 자전거를 가지고 여의도 같은 곳에 나가서 타고 놀았던 적도 많다.  집에는 그때 자전거를 타고 활짝 웃는 내 어릴 적 사진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는 엄마, 아빠가 이제는 보조바퀴를 떼고 두발 자전거로 타는 연습을 시작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두발 자전거 타는 방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균형감각이 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네발 자전거로 잘 타는데 굳이 왜 두발자전거로 힘들게 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몇번 성공은 했는데 완전히 숙달되지는 못했다.  


  우리 집 근처에 같이 놀던 친구들 중 하나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강아지를 데려오곤 했는데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강아지를 갖고 싶었는데 엄마, 아빠는 강아지를 키우는 걸 반대했다.  엄마, 아빠는 어릴 때 각자 강아지를 집에서 키웠는데 그 강아지가 죽었을 때 너무 충격받고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더이상 강아지를 키우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강아지를 키울 수가 없었다.  강아지가 없으니 강아지 인형을 사달라고 해서 흰색, 갈색 몇 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책읽는 것도 내가 좋아하던 놀이 중 하나였다.  아니,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던 것 같다.  아빠는 보통 일주일에 한두 권 책을 사주셨다.  도서관도 있었는데 책을 빌려본 일은 거의 없었다.  빌리는 것은 내 독서 스타일에도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책을 사서 읽고 심심하면 또 읽고 해서 한 권당 수십번, 아마 수백번(?) 정도 읽는 걸 좋아했다.  책의 이야기는 맛있었다.  읽을 때마다 맛있는 이야기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읽을 때마다 전에는 그냥 넘어갔던 새로운 문장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권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가장 두껍고 내용이 많은 책을 선호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어린이 동화에서 어른 책으로 조금 일찍 넘어갔던 것 같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서 쌍둥이 자매를 한 명씩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한 명은 오믈렛을 좋아하고 한 명은 오믈렛을 싫어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엄마, 아빠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바꿔살아보고 싶어서였는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음번 만날 때는 옷을 바꿔입고 다른 쪽 부모를 따라갔다.  그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3) 학교


  나는 초등학교를 좋아했다.  집에서 조금 멀리 다녀서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했다.  지하철 벽에 손을 대면 어딘가 동화속의 다른 나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벽을 이곳저곳 누르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해리포터......?) 교복을 입었는데 나름 괜찮았다.  우리는 교복을 입는 다른 초등학교 중 어떤 곳은 우리 교복보다 훨씬 예쁘고 어떤 곳은 우리보다 후지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우리 학교는 그 당시로서는 나름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도입한다고 해서 교실 벽이 없는 걸로 유명한 학교였다.  교실은 벽이 아니라 사무실용 칸막이 같은 시설로 나뉘어있었다.  당연히 교실에 문도 없었다.  우리의 창의성을 키워주기 위해 교실에는 예쁜 색깔과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가 있었는데, 대체로 카펫 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했다(진드기......).  수업 방식도 선생님이 설명하고 우리는 듣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수업이 필요한 부분은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지만, 질문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아마 수업의 절반은 설명,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알아서 뭔가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수업 내용도 교과서 진도대로 나가긴 했지만 선생님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손으로 만들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난 해에는 뜨개질을 하거나 실뜨기를 하거나 하는 것들을 많이 했고, 자연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난 해에는 교실 사방에 수족관을 만들어놓고 매일 물고기 먹이를 주고, 주말에는 선생님을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한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난 해에는 한자를 엄청 외워야 했다.  수업이 끝나면 카펫 위에 떨어진 종이조각이나 쓰레기 10개를 각자 주워서 버리고 나가는게 규칙이었다.  나는 그런 자유로운 수업방식, 수업내용이 정말 좋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취미를 가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학교 가기가 싫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좋았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스스로 원해서 세상을 알아가고 공부하고 싶어하게 해주는 그런 환경이었다.  교사가 정한 일정한 범위의 지식을 암기하도록 시키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창의적인(?) 수학 연습 교재를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시키고 있었다.  창의적이든 뭐든 계산 연습을 하는게 재미없어서 그건 정말 잘 안했다.  미루고 또 미뤄서 학기말까지 안한 채로 가곤 했었다.  선생님이 문제지 안 푼 장수당 한 대씩 때리겠다고 농담 겸 협박을 하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냥 '어차피 이렇게까지 많이 밀렸는데, 이 장수대로 다 못때려'라고 생각해버렸다.  실제로도 때리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식사는 급식이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돈까스 만들기 및 양식 먹기 연습을 한다고 가정통신문이 온 적이 있었다.  준비물은 포크, 나이프, 아이들이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접시.  급식실에서 돈까스 튀기기를 구경하고 돈까스를 하나씩 받아서 나이프로 썰어서 먹는 걸 연습했던 것 같다.  식사는 남기면 안됐다.  식사 남은 것은 어떤 통에 버리고 식판을 반납하게 되어있었는데, 그 식사 버리는 통 옆에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이 자주 서있었던 것 같다.-_-......  음식을 버리면 안 되니까 음식을 덜어주시는 아주머니에게 '조금만 주세요', '주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도록 교육받았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 활동이라고 해서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놓았다.  그때 만들기 수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한지공예, 선물 포장하기, 사탕부케 만들기 같은 것을 배웠다.  기억에 남는 건 예쁜 색한지를 손으로 뜯어서 풀로 붙여서 꽃 모양을 만드는 것.  사탕부케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서 몇 번씩 만들었던 것 같다.  사탕을 좋아한건 아니었지만, 만드는게 좋았다.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게 정말 좋았다.


  수학여행은 일본으로 두 번, 경주로 한 번 갔던 기억이 난다.  일본 수학여행을 갈 때는 준비할 때부터 정말 신났다.  아니, 준비할 때가 제일 좋았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거의 한달간 우리의 수업 내용은 일본 여행 준비였다.  일본의 역사, 일본의 문화, 일본의 관광지, 일본의 기타 등등.  그런 걸 공부하고 미리 기행문을 쓰는 것처럼, 노트에 유적지의 의미같은 것을 썼다.  나중에 실제로 거기에 간 다음 그 노트의 나머지 부분을 채워넣도록 했었다.  실제로 여행갈 곳이니까 정말 즐겁게, 꼼꼼하게 공부를 했다.  경주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행문 노트를 미리 작성해서 가는 과정이 실제 여행보다 더 즐거웠다.  나만의 책을 만드는 기분이랄까.


  이상하게 공기놀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공기놀이에 빠져서 쉬는 시간마다 카펫 바닥에 주저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그때는 다들 어마어마한 학구열로 공기를 연구했다.  공기 속재료가 잘고 부드러운 알갱이인게 유리한지, 아니면 굵은 알갱이인게 유리한지, 공기의 겉면이 부드럽고 동그란게 유리한지 아니면 모가 난 각진 형태가 유리한지, 공기가 큰게 좋은지 작은게 좋은지, 공기의 무게는 어떤 게 유리한지...... 다들 논문이라도 쓸 기세로 공기를 연구했다.  내 기억에는 보통 공기보다 약간 작은, 잘고 부드러운 알갱이가 든, 무거운, 모가 난 각진 형태인데 손을 많이 탄 공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연분홍빛, 연녹색의 공기알이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원색의 부드러운 곰돌이 공기알도 나왔었는데 친구들이 그 공기알로 나보다 더 잘하는 걸 보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공기알도 괜찮게 잘 되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공기 규칙을 다 잊어버렸지만.


  방학 때는 스케이트 강습을 들었다.  학교에서 아마 마련해준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때 스케이트를 무척 좋아했었다.  강습에 나가서 자세 연습과 실제 타는 연습을 많이 했었다.  잘하기도 했던 것 같다.  스피드스케이트를 산 기억이 있다.  항상 빌려서 신다가 스케이트가 좋아서 사달라고 졸랐나...... 아무튼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스케이트화를 사주셨던 기억이 있다.  따라가서 스케이트화를 신어보고 스케이트화가 든 가방을 들고 올 때의 기쁨이란.  스케이트화 날에 커버를 씌운 채 방에서도 신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에 외갓집에 가면 근처에 스케이트장이 많았다.  스케이트를 신고 그런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실컷 스케이트를 탔다.  나는 눈썰매보다 스케이트를 훨씬 좋아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다 잊어버렸을까......  나는 내가 한때 스케이트를 좋아했고 잘 탔다는 걸 근 십년간 잊고 살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일주일에 한번 피아노 학원에 갔다.  피아노 학원은 엄마가 유아교육 상담을 받다가 어느 대학 교수에게 추천을 받은 곳이었다.  압구정에 있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오랜 시간 가야했다.  나는 피아노 학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피아노 학원에 처음 간 건 유치원때였는데, 간 첫날 선생님이 내게 어린이 화장품 장난감이 든 바구니를 선물로 주셨던 것 같다.  나는 피아노를 좋아한 건 아니었고, 우리 학원은 피아노가 좋아지게 가르치는 곳도 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체르니를 배우면서 폼나는 곡들을 칠 때 우리는 기초가 중요하다며 몇 년간 손가락 연습을 했으니 눈에 띄는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6년 넘게 배웠음에도 근사하게 칠 수 있는 곡이 하나도 없다...... (내가 낙제생이기도 했지만.)


  피아노 학원에서는 매년 말에 발표회를 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컨셉을 잡아서 작곡을 하고, 그 곡을 피아노로 치고 사람들에게 어떤 곡인지 설명을 하는 그런 발표회였다.  그때는 피아노가 재미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내는게 정말 좋았다.  발표회에는 엄마들이 과자를 구워오기도 하고 여러가지 다과를 준비해서 나누어먹었다.  


  피아노 학원이 좋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매일 매일 해야하는 피아노 연습이 귀찮았고, 연습이 제대로 안 되었을 때 선생님이 실망하고 약간 화내는(좋은 분이었지만 성격은 좀 불같았다.  그리고 피아노에 대한 내 생각은 그냥 '어린이 취미' 정도였는데 선생님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장인정신을 가르쳐주려고 하셨던 것 같은 느낌.) 모습을 보는게 힘들고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 수업태도나 숙제 불량 상태를 엄마한테 다 이야기했고 그러면 엄마는 화가 났다.  엄마가 화가 나서 찬바람 쌩하게 먼저 걸어가면 그 뒤를 축 쳐져서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학원에서도 선생님이 나에게 실망을 많이 해서 나는 내가 시작했던 반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 단계 낮은 반으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목숨걸듯이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했는지, 피아노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린 나는 무엇때문에 내가 낙오자라는 기분을 느끼고, 내가 실패자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을까.


  그런데 피아노 학원이 나에게 정말 중요한 기여를 하기는 했다.  우리 엄마는 교육열도 나름 높은 편이었고 나에 대한 기대도 높았고 내가 성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나를 많이 혼냈다.  그런데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엄마의 그런 모습이 문제라고 상담을 좀 해주셨던 것 같다.  엄마가 그걸 계기로 뭔가 깨닫고 변하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어느날 저녁 때 감자가 가득 든 된장찌개를 먹고 있는데 엄마가 나한테 그랬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과 이야기했는데 엄마가 그동안 잘못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앞으로 엄마가 나에 관한 건 전부 내려놓고 잘해주기로 했다고.  엄마가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이고 생글생글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엄마는 그 약속을 지켰다.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내 문제로 짜증을 낸 적이 없다.  내가 뭘 하든 엄마는 항상 밝았다.  그래서 그 날을 잊지 못하나보다.  그리고 내가 원해서 피아노 학원도 곧 그만두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학원은 글짓기 학원이었다.  당시 아동문학가였던 선생님이 야심찬 생각으로 만든 학원이었다. (엄마는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걸까......) 대치동의 약간 허허벌판(?)에 있었던 학원이었는데 근처에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항상 거기에서 컵떡볶이와 삶은 계란 하나를 사주시곤 했다.  음...... 먹을 것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니라 거기서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글짓기를 하고, 항상 칭찬을 받고, 책도 실컷 빌려올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피아노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글짓기는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피아노 학원의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시도 쓰고 독후감도 쓰고 여러가지 글쓰기 방법을 배우고 많이 써봤다.  글쓰기 훈련을 했다기보다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려준 곳에 가까웠다.  시를 써서 어린이 신문에도 게재되고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받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떤 글짓기 대회에서 72색 크레파스를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소장중!



         

    

              

*글을 쓰면서 뭔가를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쓰고 나서 뭔가를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놓듯 부담없이 글을 쓰고 잊으면 된다.  특별히 생각하려고 할 필요 없다.  이미 이 글을 쓰느라 여러가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의 정신은 과거의 일들을 기억해내고, 짜맞추고, 어린시절의 추억속에 빠져서 잠시나마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정신에게 맛있고 건강한 한끼 식사를 대접한 것과 같다.  정신에게 조금 더 '근력'이 생겼다.  


덧붙여,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당신을 지탱해주는 토양이다.  당신은 뽑혀나간 풀뿌리가 아니라, 이 추억들 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건강한 작물이다.  우울증으로 아무리 힘들지라도 이 땅 위에 꿋꿋이 서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당신은 이번 연습으로 당신이 뿌리내린 토양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사진들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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