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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12. 2018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

자살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시도해볼 만한 것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거나 없을 때)


준비물: 천사점토, 아크릴용 물감, 손 정도 크기의 네모난 상자(페레로 로쉐 초콜렛 플라스틱 상자 추천)


도서관에서 빌려올 책: 너무 이른 작별(칼라 파인 지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네 사람의 이야기(서울시자살예방센터 자작나무 에세이 모임 지음)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의 자살유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이다.  모임에 참여한 자살유가족들이 쓴 에세이를 모은 책이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네 사람의 이야기'이다.  도서관에 비치된 경우가 많은데, 정 없다면 아래 인용할 구절을 읽는 것도 괜찮다.)



미션 1: 관에 담긴 '나'를 만들기

 


  자살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닌데 죽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을 힘으로 살면 뭔들 못하겠어?',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자살을 해?  무책임하군.'


  자살자들은 그걸 몰라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데 무책임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살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자살하려는 사람'이다.  자살할 날을 잡아놓고 하루하루 준비해본 경험이 있는가.  자살할 장소와 방법을 정하고 목숨을 끊는데 필요한 도구를 준비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부터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깝게 느껴지는지.  나는 그때만큼 간절하게 살고 싶었던 적이 없다.  무기징역보다 사형이 인간에게 더 잔인한 형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갈꼬  



  성삼문의 절명시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날 성삼문은 이미 가혹한 고문으로 온 몸이 찢기고 곪고 불구의 몸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더이상의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것이 나을 상황이다.  그런데 이 절명시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마음, 삶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살고 싶지 않다면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것으로 들릴 이유도, 살아서 마지막으로 보는 석양을 눈에 담을 이유도 없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성삼문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 다름이 없다.  자신의 신념을 굽혀 세조에게 충성을 바쳤다면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세조에게 충성하고 살아남느냐, 찬탈자를 꾸짖으면서 죽느냐.  이 두 가지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삼문은 도무지 삶을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충신과 보통의 자살자를 비교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그 심정만큼은 자살자도 비슷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차마 삶을 선택할 수가 없어서 죽음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왜 자살자는 그렇게나 살고 싶은데도 죽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걸까.  

  

   

  내 경우에는 실패한 인생을 사는게 남보기 수치스러워서였다.  이게 대충 3년 전의 일이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따지면 지금이 더 안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지난 3년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그나마 있던 조금의 기회도 모두 놓쳤다.  그런데 나는 지금, 3년 전에 내가 자살하려고 했던 이유에 전혀 공감을 못하고 있다.  왜 그러지......  그때는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했고 내 장래에는 남들의 비웃음만 사는 삼류 인생, 동창회에 나가도 잘 나가는 친구들의 업적(?)에 존경을 표시해야 되고 그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실패자의 삶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진지하게 내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그런 인생을 사는 고통을 겪느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는 자살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으면 엄마는 매일 울었다.  나를 낳아서 이렇게 힘들게 만든 게 너무 미안하다고.  오죽하면 엄마가 나에게 그랬다.  같이 죽자고.  네가 자살하는게 고통스럽지 않을 방법이라면 같이 죽는게 나을 것 같다고. (나같은 자식은 꼭 지옥에 가야 된다......-_-  살아서도 우울증이라는 지옥에서 너무 많이 고통받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단정지었던 것은 내가 당시 우울증적 사고에 빠져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객관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내가 속해있던 학교, 분야는 굉장히 경쟁이 치열한 곳이고 끊임없는 서열놀이와 암묵적인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 사회에서 나는 분명히 실패했다.  나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무능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나를 무능하다고 낙인찍는 사람들의 한심하다는 시선과 말 속에서 나는 시들고 뭉그러져서 진짜 능력없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살아갈 의욕도 잃어버렸다.


    

  그때는 매일 지하철에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펑펑 울었다.  걸으면서도 울었고 밥을 먹으면서도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울다가 힘이 빠지면 잠들고 일어나면 다시 울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자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살장소와 방법을 결정하고 도구를 준비했다.  날짜도 정했다.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살고 싶어서 도서관에 가서 내 마음을 돌이켜줄지도 모르는 자살유가족에 관한 책들을 빌려왔다.  나는 진심으로 내 마음을 설득하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너무 확고했고 반복되는 고통으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천사점토도 사왔다.  나와 엄마는 사이가 굉장히 각별하다.  엄마는 항상 나를 인정해줬고 내가 미술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버린 그림들이나 점토 작품들도 엄마는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전부 간직했다.  나는 엄마의 생신마다 내가 직접 만든 뭔가를 선물했다.  점토로 만든 펭귄, 강아지, 다양한 재료로 만든 꽃들,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작은 코끼리 인형, 아니면 여러가지 그림들.  엄마는 백화점에서 사온 지갑이나 가방보다 내가 만든 작품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앞두고 나 자신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내 모양의 인형을 보면서 엄마가 나를 추억할 수 있을 테니까. (지옥에 두번 가도 모자란 나란 인간......)


  인형을 만드는 내내 눈물이 났다.  인형의 반은 눈물일 정도로.  손톱으로 눌러서 눈과 눈썹, 코와 입을 만들었는데 그건 나 자신의 표정이었다.  반복된 고통으로 가슴이 찢겨져나간 내 얼굴이었다.  평온하게 잠든 인형을 만들고 싶었는데 나를 닮은 인형의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페레로 로쉐 초콜렛이 담겼던 플라스틱 통 겉면에 점토를 씌우고 금색, 검정색,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아크릴 물감을 덧칠해서 인형이 담길 관을 만들었다.  


  인형을 만들면서, 내가 죽은 다음 이 인형을 붙들고 울 엄마를 생각하며 수없이 울었지만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빌려온 책을 읽었다.



미션 2: 자살유가족이 쓴 책 읽기

          

  지금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미션을 마지막으로 한번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죽어 누워있는 자기 인형을 만들면서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생각해봤으면 좋겠고, 자살유가족이 쓴 책도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특히 자살유가족들이 쓴 책은 꼭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열달간 당신을 품고 고통 중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산고를 겪어가며 당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읽었던 책은 칼라 파인의 '너무 이른 작별'과 다른 자살유가족이 쓴 책 한 권이었다.  그때는 자작나무의 에세이집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어서 읽지 못했다.  이 책은 나중에 도서관에 들어와 읽게 되었다.


(출처: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8202370)


  나는 자살에 관해서 검색하다가 '자살유가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자살유가족이란 말 그대로 자살 후 남겨진 가족들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 사고사든 자살이든 똑같은데 왜 사고유가족이라는 말은 없는데 '자살유가족'이라는 단어는 있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 그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했다고 치자.  그러면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등 뒤에서 뒷담화를 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 경우라면 다르다.  자식의 시신을 수습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쯧쯧...... 아파트 값 떨어지겠네.  왜 여기서 자살하고 난리야.", "정신병이 있나보네.", "저 사람이 아버지야?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자살을 다해.", "술 쳐먹고 자식 패고 그러다가 자식 죽인거 아니야?", "화단 지저분해졌네.  피냄새 어떻게 해.  저거 누가 치울거야.", "우리 애들이 보면 큰일인데.  얘들아, 얼른 들어가.", "아, 재수없어.", "자살은 가족력이 있다는데 저 집안 사람들 다 정신병자인거 아니야?  같은 아파트에 살게 놔둬도 되는거야?"......


  자살유가족에게는 사고유가족과 달리 이런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이 따라다니게 된다.  그래서 감출 수 있는 경우라면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살유가족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자살유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자식, 내 배우자, 내 부모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나 때문이 아닐까'하는 자책일 것이다.  이 두 책에 나온 자살유가족들의 글을 보면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자살유가족들은 자살한 가족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자살은 자살자 본인에게는 모든 고통의 끝일지 몰라도, 그 가족들에게는 지옥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 자살은 가족에 대한 살인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해야 하나.  자살자의 우울증이 자살유가족의 우울증으로 전환되어도 그 고통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이 고통을 짊어지지 않으면 가족들이 이 고통을 전부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야 되는게 아닐까.  아무리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생각되더라도 내 삶에 단 하나의 의미는 있는 것이다.  내가 내 고통을 참고 견딤으로써 내 가족들은 이 고통을 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부모에게 온전하든 박살이 났든 당신의 시체를, 남들이 저런 소리를 등 뒤에서 해대는 와중에 수습하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나는 그 뒤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단 한번도 자살을 생각하지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객관적인 상황은 변한게 없는데 내 마음이 변했다.  아무리 우울증으로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워도 자살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답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이게 내가 내 부모를 위해서 하고 있는 효도이고 내 삶이 의미있는 이유이다.


  또 한 가지 더.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때 내가 왜 죽으려고 한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때의 절절했던 감정이나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게 나를 태웠던 고통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그때의 고통을 되살려보려고 해도 잠에서 깨어나 지난밤의 꿈을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아득하고 희미하다.  그렇다면 그때 나는 무엇을 위해서 죽으려고 한 것일까.  겨우 3년이라는 시간에도 잊혀질만한 고통때문에 내 목숨을 버리려고 한 걸까.  소름......-_-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자살유가족들이 직접 쓴 에세이 모음집을 소개하고 싶다.  제목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네 사람의 이야기.  '자작나무'는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에서 자살유가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자살유족의 작은희망 나눔으로 무르익다'라는 프로그램의 약칭이다.  그 모임에서 고통을 글로 써보라고 해서 쓰게 된 것들을 모은 수필집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처음에 있는 글만 읽어도 충분하긴 하다.  다 읽는데 10분 정도?  자살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마지막 10분 정도는 이 책을 위해 할애할 수 있지 않을까.


  첫번째 편은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전쟁 후의 우리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온갖 풍파를 겪고 자랐다.  아버지는 조금의 불의도 넘기지 못하고,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자란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강한 모습을 원했다.  아들이 굳센 의지와 끈기로 험한 세상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게 아버지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친구들에게 맞아도 그냥 맞고만 있는 순한 아이였고 아버지가 보기에는 꿈도 의지도 없는 나약한 아이였다.  


  군대에 다녀와 대학교에 복학한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날 아들이 상의할 것이 있다고 아버지를 찾아와서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의 주인이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처음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조언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을 질책하고 만다.  최저임금에는 못 미쳐도 약속한 임금을 지급했는데 주인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달라고 요구 한번 안해보고 신고하는게 맞냐고 화를 내버린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제가 부담스러우세요?'  


  사실 아들은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상담치료도 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후회했지만 아들이 부담스러운게 아니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날 밤 유서를 쓰고 나온 아들과 아버지가 마주쳤다.  아버지는 속으로는 술 한잔 하자고 하고 싶었는데 그 다음날이 하필 월요일이었다.  출근해야 되는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들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냥 보았다.  그날 아들은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책을 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몇몇 구절을 여기 인용해보려고 한다.




  내 아들이었다.  청바지에 한 손을 올리고 구겨진 한 팔과 얼굴이, 내 아들이었다.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난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그래도 설마 하며 다시 얼굴을 쳐다보았다.  뇌수가 흘러나와 내 왼팔을 적셨다.  아들의 몸은 참혹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못 살 것 같았다.  나도 바로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놔두고 엘리베이터로 갔다.  그런데 그때 딸애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나를 부둥켜안았다.  나도 같이 딸을 안았다.

  비로소 울음이 나왔다.  울고 나니 좀 정신이 났다.  우선 화장실에 가서 피부터 닦았다.  피가 물을 타고 세면대로 흘러내렸다.  내 새끼의 피가.......


  시신은 냉장고에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내진 시신이 내 앞에 보였다.  나는 아들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 차가운 냉기가 심장을 파고들어왔다.  그 순간 평생 처음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말이었다.  나는 외쳤다.  말을 하면서도 한없이 울었다.  아들 시신 앞에서 터져 오르는 자책감으로 어쩔 줄 모른 채 외치고, 울었고, 외치고 울었다.  아, 진작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단 말인가?  울면서 하지 않고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이라도 하면서 다정다감하게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야 했었다.  바보도 천하에 이런 바보가 없을 것이다.


  화장터에서 나오면서 처음으로 음식이 입에 들어갔다.  주변의 권유로 억지로 넣으니 들어갔다.  그날 저녁은 변이 숯처럼 새까맣게 손가락만큼 나왔다.  아직 타지 않고 남은 내장이 있을지 싶었다.  3일을 우유 한 잔 먹고 장례를 치르면서 구슬프게 우는 집사람을 보니 애간장이 찢어지듯 아팠다.  이 죗값을 어이 다 치러야 한단 말인가.  아, 내 한 몸 죽음으로써 다 끝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막상 장례가 끝나자 장례식 때 느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을 뜨면 송장만 살아 있었고 눈을 감으면 아들 생각이 났다.  거리를 걸어갈 때는 높은 곳을 쳐다보다가, 바닥을 쳐다보다가, 다시 높은 곳을 쳐다보다가....... 왜, 왜, 왜를 외쳐야만 했다.

담배를 하루에 여섯 갑씩 피웠다.  저녁마다 폭음을 했다.  밤에는 술을 먹고 낮에 깰 때는 호흡을 헐떡이며 죽음만을 생각했다.  성격이 매우 급한 내가 행여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몇 달 동안을 아이가 죽은 이유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녔다.  무슨 이유로, 어떤 이유로,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나는 아들이 왜 아팠는지, 내가 왜 아픈지 알고 싶어서 몸부림쳤다.


  내가 죽어 저세상으로 가면 아들이 마중을 나올 것이다.  나는 단연코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때 아들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들아, 이제는 손잡고 같이 가자.  목적지가 어디든.'

  미친 사람처럼 한 해, 두 해를 보냈고 세 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그날, 아들을 보내던 날 열렸던 지옥의 문은 이제 닫힌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아들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살아갈 뿐이다.


  무슨 염치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지옥을 겪어 온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마세요.  나쁜 아이가 되어도 괜찮으니 제발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세요.  이것은 다 너를 위해 피어난 꽃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그냥 자식을 지켜봐 주면서 믿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네 사람의 이야기' 첫번째 편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인용-





  책을 구할 수 있다면 전체 내용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을 굉장히 잘 쓰시기도 했고, 이분이 자살유가족으로서 아들을 잃은 고통을 견뎌낸 방법들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족이 살아온 환경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일만한 나름의 성장배경이 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냉정하고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고 자식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면 당황하고 피하려고 한다.  뭔가 부적절한 화제이고 금기를 건드린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이 글을 발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브런치의 '키워드'에도 자살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을 끝내려는 결심인 '자살'은 역설적으로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자기 성찰과도 같다.  자살을 금기시해서는 자살을 막을 수 없다.  자살시도자도, 자살에 임박한 사람의 가족도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자살시도자가 '신호'를 보내기 훨씬 전에, 가족들과 찜질방에 가서 삶은 계란을 먹고 차가운 식혜를 마시면서 이렇게 한번 물어보는 건 어떨까.  "너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니?"  자살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신호 따위 보내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을 꺼내보는 거다.  "엄마, 나 사실은 자살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어."


  속마음을 다 이야기하다보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알게될지도 모른다.  성공이 가장 중요한 건줄 알았는데 가족이 그것보다 훨씬 소중하다거나, 가정에 돈을 벌어다주는 가장의 책임이 가장 중요한 건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원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시험에 실패하고 비트코인으로 있는 돈 다 털어먹었다 한들 뭐가 대수랴.  자기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일 수도 있는건데.  가족들은 당신이 장애를 입고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살아만 있어달라고 눈물흘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자기 인생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다시 살아가기.  그건 죽음까지 가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  어린아이는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친 것이 들통나 매를 맞을까봐 멀리 도망치고 싶어한다.  초등학생은 학교 시험에서 20점을 받고 아빠한테 혼날까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걱정한다.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끝장이다!'라고 생각해서 비참하게 눈물흘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참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서 몇 년이 흐르면, 우리는 그때 왜 고통받고 죽으려고 했는지 기억도 못하게 되는 날이 또 온다.  어릴 때 수없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조금만 참고 오늘 하루를 한번 용감하게 버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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