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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18. 2018

우울증 환자를 위한 실전 매뉴얼(3)

마을 도서관 여행하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


준비물: 운동화, 마을 도서관 약도



미션 1: 마을 도서관 방문하기


  어느 마을에나 도서관이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명과 도서관을 검색해보면 우리 마을 도서관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찾아볼 수 있다.  그동안 다이소까지 몇번 걸어갔다 왔다면 어느 순간에는 다이소라는 공간이 지겨워질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우울증때문에 피폐해진 내 정신에 예쁜 물건들, 색상, 촉감같은 것들이 신선한 자극이 되어줄 수 있지만, 조금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면 단순한 물건보다 더 발전된 자극을 슬슬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음으로 가볼 곳은 도서관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보다 더 큰 도서관도 얼마든지 있다.  정독도서관, 서울도서관, 별마당 도서관 같은 대형 도서관들도 있지만, 그런 곳들 보다는 동네 도서관이 우리의 작업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런 대형 도서관 인근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서관까지 '걸어갈 수가 없다'.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책을 읽는데 있는게 아니라 매일 햇빛을 쬐며 걷는데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두번째로, 그런 대형 도서관들의 단점은 장서가 너무 많기 때문에 보기만해도 조금 피곤하고 위압감을 느낀다.  책의 제목을 읽으러가는 우리의 목적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매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우리 동네 도서관으로!



미션 2: 도서관의 모든 서가를 '대충' 훑어보기  

  

  처음에는 아마 책을 고를 수도,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굳이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도 평소에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어떤 책을 골라 그 책에 시간과 집중력을 할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서관의 책들을 눈으로, 대충대충 훑어보는게 좋다.


  서가를 거닐면서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자.  도서관이 몇개 층으로 되어있다면 계단을 오르는 것도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올라가본다.  자기계발서 코너나 영어 등 학습책이 있는 코너는 가볍게 건너뛴다.  문으로 들어가 첫번째 있는 서가부터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처럼 둘러본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이렇게 '이달의 책'같은 것이 전시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가볍게 눈길을 주면서 지나간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라니 제목만 봐도 뭔가 가벼워지는 느낌인데, 휘게에 관한 책도 있네, 사람들이 다들 힘든가보다, 이런 책들을 많이 찾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을 대충하면서 열람실로 간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면 잠깐 서서 책을 훑어보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책을 읽으러 온 게 아니라 '구경'하러 온 거니까.




  어린이용 동화를 따로 모아놓은 곳이 있거나 아예 어린이 도서관이 별도로 있거나 하는 등 도서관마다 다르긴한데, 맨 처음에는 어린이용 동화를 보러 가는 것도 좋다.  '작은 아씨들'이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우리가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추억의 책들도 있고, 전혀 모르지만 제목은 참 흥미로운 책들도 있다.  '끼이이익 콩 끼이익 쿵'은 무슨 소리지?  어린이 책이니까 공포소설은 아닐텐데, 뭐가 내는 소리일까?  껍데기가 빠지직 하고 속에서 뭐가 나왔다는 걸까?  우유를 보고 왜 놀랐지?  뭘 열어달라는 거야.  그냥 이런 생각들을 가볍게 하면서 지나간다.


  조금 흥미가 생긴다면 책을 펴서 한번 훑어본다.  어린이용 동화들은 그림이 많고 간결하기 때문에 20초 정도만 할애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파악하는데 충분하다.  '작은 아씨들'을 어릴 때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을 모르겠다면 잠깐 퍼질러 앉아서 읽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어린이실의 책들은 어린 시절의 끝없는 호기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된다.  어린이 동화들은 제목이 전부 재미있는 것들 뿐이다.  우리는 어릴 때 흥미로운 제목을 보고 그 내용을 빨리 알고 싶어서 안달난 기분으로 책을 읽곤 했다.  우리가 지금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이유는 그때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우울증 때문에 아무 의욕도 없는 우리의 정신에게 어릴 때처럼 다양한 주제를 던져주기 위해 제목들을 읽는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책의 제목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뇌는 자연히 어린시절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어렸을 때 끝없이 호기심을 가졌던 그때의 느낌, 빗방울이 왜 생기는지도 알고 싶고 해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도 궁금했던 그때의 기분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보면 우리의 정신에는 의욕이라는 싹이 아주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한다.      




  어린이실 탐색이 끝나면 어른들의 세계로 입장한다.  001번은 대개 철학책부터 시작한다.  철학은 제목들이 화두와 비슷하다.  모든 길은 플라톤으로 통한다?  지중해?  뭔가 따뜻하고 푸른 바다도 생각나고 지중해식 샐러드, 오일, 올리브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플라톤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인데.  왜 모든 길이 플라톤으로 통한다는 거지?  철학은 또 뭐가 즐겁다는 거야?  철학.  그러고보니 인간이 왜 존재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게 맞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게 철학 아니었나?  에잇, 그래도 철학은 머리아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지나간다.  




  이렇게 얇고 가벼우면서도 온갖 주제들에 대해서 다루는 시리즈물도 있다.  미국을 만든 사상이란 뭘까?  커피 이야기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축구의 문화사라.......  반연극은 뭐지?  부조리극?  뭐,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거 말하는 건가?  아, 맞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지나가다 남들이 빌리고 반납한 책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도 잠시 멈춰본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여행에 관한 코너에서는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보는 것도 괜찮다.  우울할 때는 기분전환겸 어딘가 떠나고 싶거나 아예 다른 낯선 장소로 가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떠나자니 어디로 가야할지도 막막하고 여행을 간들 뭐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는 여행기를 많이 읽었다.  스페인, 남미, 프랑스, 일본에 관해서 괜찮은 여행 에세이집들이 많아서 그쪽 위주로 읽었던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들, 손미나 작가의 책들도 여러번 읽었다.  그런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조금 되는 기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이 여행을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멀리 가기는 조금 힘들어서 서울 안에서 돌아다닐 만한 곳들이 어디어디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여행 코너에는 서울에서 가볼만한 곳들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책들이 10권도 넘게 있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가볼만한 곳 목록을 만들었다.  지금은 매주 그 목록을 보면서 가고 싶은 곳을 그때그때 골라서 다니고 있다.   




  도서관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만화책이 있는 곳들도 있다.  '오무라이스 잼잼'은 한때 재미있게 봤던 웹툰이다.  음식 그림들도 괜찮았고 음식과 관련된 추억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해줘서 좋았던 것 같다.  

   



  그밖에도 흥미로운 책들이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책은 바로 '리락쿠마의 생활'.   책 제목읽기 탐방을 하면서 이렇게 흥미를 느낀 책 제목은 없었다.ㅋㅋㅋ  그냥 재미삼아 집어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책이었다.  짧은 글과 리락쿠마 그림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내 귀는 영업시간이 지났으니까 잔소리를 하려거든 내일 다시 오세요!)


  그 옆에 있는 '자살토끼' 책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약간 엽기적인 그림들도 있긴 한데 웃음짓게 만드는 그림도 꽤 있는 편이다.  머리 식히기에 괜찮은 책이다.  진짜 자살을 생각하던 시기에 이 책을 읽었었는데 진지한 책인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가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음으로써 자살을 기도하는 토끼들...ㅋㅋ)


  이렇게 책 제목들만 대충 훑고 와도 우리의 뇌는 이미 많은 일을 했다.  제목들을 보면서 옛날에 읽었던 책이나 연관된 일들을 생각해내고,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상상하면서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마음속에 조금씩 의욕도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여행이나 뜨개질, 그림, 플라톤,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들, 언젠가 들어본 적 있지만 읽지는 않았던 소설책들.......  첫날에는 책을 집어들 힘조차 없겠지만, 당신의 뇌는 이미 조금씩 당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일주일쯤 하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도서관에 가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는 그냥 책 제목만을 읽었다.  자세히 읽은 것도 아니고 대충 대충 읽으면서 지나갔다.  그러다가 힘들면 의자에 앉아 쉬면서 멍때리고 있기도 했다.  도서관 서가를 다 훑은 다음에는 하루의 일과를 끝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냥 책 제목만 읽고 왔는데도 일주일쯤 지나자 변화가 왔다.  뜨개질에 관한 책이 있는 곳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문득 뜨개질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닥쳐왔을 때 뭔가 집중할만한 취미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뜨개질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책을 빌려오고 유투브를 찾아서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민화에 관한 책들을 스쳐지나간 적이 있는데 갑자기 민화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민화박물관도 다녀오고 민화에 관한 책도 빌렸다.  민화 강좌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민화 물감 등을 벌여놓고 그리는건 지금 마음의 상태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하다 수채 색연필을 샀다.  민화 스케치를 따라 그리고 수채 색연필로 채색을 했다.  그렇게 그림 그리기라는 또 하나의 취미가 생겼다.


  서가를 지나가다가 미술치료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내용이 꽤 괜찮아서 드로잉북과 오일 파스텔을 놓고 따라그리기를 시작했다.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책들을 읽고 나의 병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한때 굉장히 감명깊게 읽었던 책들을 다시 발견해 읽기도 했다.  지금은 염소젖과 흰빵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도 읽고, '플라이, 대디, 플라이'도 읽었다.  바보 이반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톨스토이 단편선'을 빌려오기도 했다.  점점 도서관에 앉아서 읽거나 빌려오는 책들이 늘어갔다.  관심이 가는 것들도 늘어나고 뭔지모를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한달이 넘도록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도서관까지 걸어오고 책의 제목이라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발전이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





*약간의 팁이라면, 한 3일째나 4일째 되었을 즈음에는 그동안 살면서 읽었던 책의 목록들을 한번 작성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에서부터 가장 최근에 읽었던 소설까지 기억나는 것 전부를 한번 써본다.  예를 들어, '초콜릿 공장의 찰리', '알프스 소녀 하이디',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분노의 포도'...... 이런 식으로.  책의 목록을 작성하다보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좋았거나 나빴던 감정, 그 책을 읽을 당시의 기억들도 떠올릴 수 있고 그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아마 내용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제목을 모르겠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 목록 중에서 가장 읽고 싶다고 생각되는 것들부터 한권씩 시도해본다.  낯선 책을 읽는 것은 피곤하고 내키지 않지만, 익숙한 책을 읽는 것은 부담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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