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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07. 2018

정신을 위한 재활치료(1)

영화 '리틀 포레스트' 보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


준비물: 운동화, 현금 7,000원 정도(영화표 한 장 살 돈), 간단한 도시락(샌드위치 추천... 영화보면 알아요)



정신에도 재활치료가 필요하다


  재활치료란 장애를 가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신체적, 감각적, 지능적, 심리적, 사회적 수준을 성취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수행하는 모든 치료를 말한다고 한다.  우리 신체의 일부가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신체의 일부가 다시 기능할 수 있도록 훈련하거나 그 신체 부분의 역할을 주변의 다른 부분이 담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  그런 것들을 보통 재활치료라고 부른다.


  우울증 환자의 정신에도 그런 의미에서의 재활치료가 필요하다.  심한 우울증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자신의 인지능력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억력이 감퇴했다거나 예전만큼 암기력,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다거나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다거나 무엇을 봐도 호기심이 없고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한때는 2시간, 3시간씩 집중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우울증이 심해진 이후에는 하루 5분도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기억력도 떨어져서 신용카드를 챙기거나 가방에 넣어놓았던 물건을 다시 꺼내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도 자주 잊어버린다.  감정 조절도 잘 안돼서 자주 가던 식당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 자신조차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종업원에게 고함을 지른 적도 있다.  나는 어떤 책에도, 어떤 여행에도, 어떤 음식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고 슬프거나 화나거나 하는 사건들을 봐도 별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 누군가 전화를 걸어서, 전국민의 관심을 끌던 장기미제사건의 진범이 누군지 알려주겠다고 말했어도 나는 경찰서에나 연락해보라고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내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 문제있냐옹......)


  우울증으로 인해 찾아온 인지능력의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부정적인 사고회로도 손봐야 하고, 뭔가 정신에 자극이 될 만한 것들도 자꾸 넣어줘야 한다.  그저 우울감, 불안감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정신은 하루하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오랫동안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한 위가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을 위해서 정신적인 영양분을 섭취해주는 것, 그게 우울증에서의 재활치료다.


(정신에게 영양분이 듬뿍 들어있는 음식을 먹여야 한다...... 정신에게 양보하세요!)


  물론 우울증 환자는 호기심이란게 다 말라 비틀어진, 오로지 내 고통만 느끼고 내 고통만 보이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영양분을 섭취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우울증때문에 몸도 인정사정없이 굶기는 사람들이 우울증 환자들인데 하물며 정신을 챙길 여력이 있을까.


  하지만 앞서 말했던 '다이소까지 걸어가서 물건 사오기' 미션, '자기 암시 챈팅' 미션에 몇번 성공하고 나면 정신에도 조금씩 '근력'이 붙기 시작한다.  뭔가를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미약한 힘이나마 생긴 것이다.  그럴 때는 본격적으로 정신을 먹이기 위해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영화관에 걸어가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감상하고 오는 거다.


(사진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4449)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가 아니라 심리치료 공간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감상하고 오세요~  아마 우울증 환자들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 뭘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뻔한 스토리잖아요, 그런 류의 힐링 영화는 지겨워요, 지루할 것 같아요, 나한테 뭘 가르치려고 들지 말아요, 당신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서 내가 감동받으리란 보장이 있나요, 사람 많은 영화관 가기 무서워요, 나중에 다운받아서 볼래요, 그냥 누워서 자고 싶어요.......


  몇 달 쯤 더 버티다 또다시 고통에 울부짖고 자살해버릴 사람이라면 그냥 자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거 아니라면 한번 나를 믿고, 영화 감상하러 가줬으면 좋겠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꼭.


  나도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에 극도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날이 서 있는 사람이다.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방법들을 시도하다보니 힐링에도 질릴만큼 질렸고, 무슨 영화를 보든 무슨 좋은 말을 듣든 내 인생이 변화될 리 없다고도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는 제목만 봐도 불태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감동적인 인생역전 극복 스토리에도 역겨움을 느낀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좋은 글들을 읽는 것 자체가 두렵다.  그토록 많이 읽고 많이 시도했는데도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감동받는 것 자체가 두렵다.  수없이 감동받고 이걸 실천하면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음에도 나는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고 내 삶이 달라진 것도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같은 환우가 추천하는 영화라면, 한번 보고 와도 괜찮지 않을까?


(사진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4449)


뭐가 있어서 보라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보라는 거다.


  이렇게 강하게 말하면,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에 뭐 대단한게 있다는 거야?  그걸 보면 우울증이 치료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거야?


  그런데 이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상 가서 보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것도 없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점심을 먹는데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명대사도 없고 정말 뭉클했던 감명깊은 장면도 없다.  엄청 웃긴 장면도 없었다.  심지어 영화의 스토리도 별게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은 분명한데, 속으로 '뭐지?' 싶었다.  무슨 영화가 이래.......


   생각나는게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고 간단하게 적어보니 몇 가지는 기억이 난다.  언 배추로 끓인 배추국, 강아지 오구, 뜨개질한 오구의 목도리, 토마토 농사는 강수량에 달린 복불복인데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불복!'이라는 것, 엄마가 보내온 감자빵 레시피, 사람도 그 땅의 햇빛을 받고 바람을 쐬고 자란 작물이라는 것, 밤조림을 하려고 밤을 물에 담가두고는 '내일 봅시다!'하고 들어가 자던 것, 바쁜 척하면서 숨기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추수 얼마 전에 폭우가 쏟아져 벼 세우기 작업을 하는 것, 닭도 언젠가는 지붕에서 내려온다는 것, 양파 아주심기, 밭에서 양파 두 개를 훅 뽑아와 만든 양파요리...... 


  별로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중간에, 그리고 보고 나온 이후에 계속, 나는 기억들을 조금씩 떠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4449)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남자친구와 함께 준비하던 임용시험에서 남자친구만 붙고 자기는 떨어지는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무작정 시골집으로 내려와 밥을 해먹고 지내다가, 얼떨결에 1년간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서울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던 주인공은, 시골로 돌아와서는 직접 배추를 뽑아서 국을 끓여먹고, 막걸리를 담고 콩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그 과정에서 항상 떠올리는 건 엄마의 기억이다.  엄마가 이 요리를 할 때 한 말들, 내가 힘들어 할 때 엄마가 이 요리로 나를 위로해줬던 것, 이 요리를 먹으면서 엄마가 했던 행동들...... 그러면서 주인공은 어릴 적의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리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사람이 자란 토양과도 같다.  이 영화에서 말하듯 사람을 하나의 '작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작물은 20년 이상 땅에 뿌리박고 자라면서, 어떤 햇빛과 바람과 양분과 빗방울을 만났다.  그 모든 것들이 작용해서 한 사람을 빚어낸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은 그 땅, 햇빛, 바람, 양분, 빗방울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  


  요즘은 생산자가 누구인지 사진을 붙여서 파는 농작물들이 많다.  햇빛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 사진과 함께, 그 농작물이 자란 곳이 어디인지, 그곳의 기후가 어떤지 함께 설명해놓은 상품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설명을 읽으면서 내 손에 들어온 이 농작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 많고 당당하고 세상을 다 만나고 싶어했던 나와, 그런 나를 키워주었던 사람과 환경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뭔지 모르게 활력과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사진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4449)


  이 영화는 그걸 도와준다.  보는 내내 내가 생각했던 것은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  나의 엄마가 어릴 때 나에게 해줬던 말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 내가 어릴 때 슬펐던 일들 등등. 


  따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어린 시절을 추억해야지' 하는 것보다는, 이 영화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추억들을 붙잡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잔잔하고 복잡한 스토리도 없고 관객들에게 딱히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없어서, 보고 듣고 생각하기에 좋은 영화이다.


  그러고나면 정신의 근력이 조금 더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세상 끝난 것 같이 울다가도 아이스크림을 쥐여주면 금새 웃던, 그 마음의 탄력을 조금은 다시 느낄 수 있다.  덧붙여, 식욕도 생긴다:)    




*사람이 붐비는 장소나 천장이 높고 넓은 장소가 아직 부담스럽다면, '아리랑 시네센터'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방법이다.  (성인 7,000원)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쭉 걷다보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162번, 2115번, 1014번, 20번 버스를 타고 아리랑시네센터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 타고 두 정거장 거리.  버스 길을 따라서 쭉 걸어올라가도 괜찮다.  도보 10분 이내 거리.


(이 정도의 사람없는 작은 상영관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두 번째 상영시간은 아기 데리고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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