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Apr 19. 2018

여행치료: 제주 4.3사건 전시회

너븐숭이 유령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고, 조금 음울한 기분도 견딜 수 있을 때)


준비물: 교통비 (전시회는 무료)


슬프고 충격적인 '남'의 비극은
내 고통의 크기를 돌아보게 해준다



  가끔은 '남'의 일에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제주 4.3사건을 '남'의 일이라고 하는게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의자에 앉아 컴퓨터와 마주하고 있는 '나'의 일은 아닌게 분명하니까 '남'의 일이라고 써본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제주 4.3사건 전시회를 관람하게 되었다.  제주 4.3사건이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두컴컴한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공사장처럼 시멘트 바닥이 거칠게 드러나있는 그 공간에서 내가 만난 것은 '죽음'이었다. 




  그냥 죽음이 아니었다.  아무 죄도 없이, 이유도 모르고 학살된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수의를 입은 해골들, 목이 없는 사람들의 그림, 희생자들의 이름을 작게 쓰기만 했는데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워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총에 맞아 턱이 날아가 평생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던 할머니의 초상.  눈이 번쩍 뜨였다.




  실제 있었던 수많은 비극의 아주 작은,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데도 슬프고 섬뜩했다.  아무것도 모른채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눈앞에서 가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던 고통의 크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들의 고통에 갑자기 압도당하자 내 안의 우울증은 조그맣게 몸을 웅크렸다.  나의 우울증과 현재 겪고 있는 여러가지 힘든 상황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내 삶은 내가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고 소중한, 애틋하고 간절한 생명일 것이다.  전시회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남아있는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오묘한 감정을 가진 채 전시회장을 나오게 되었다.  살아서 오늘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게 송구하면서도, 기뻤다.        





제주 4.3사건이란 무엇일까? 


  제주 4.3사건이라길래 어느해 4월 3일에 일어났던 학살사건인줄 알았다.  수능 문학지문에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문학작품에 들어있던 '순이삼촌'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그런데 오륙십 명씩 열번을 몰아가 총으로 쏴죽인 다음 열한 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고장이 났던 대대장 차가 뒤늦게 도착해 총살중지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살았다는, 운수대통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그 소설이 제주 4.3사건에 관한 것이라길래 그 책에 나왔던 학살이 있었던 날이 4월 3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 4.3사건은 단 하루의 학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멀게는 일제강점기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어왔던 제주도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편견, 가까이는 1947년의 '3.1절 발포사건'에서부터 시작되어 수년간 지속된 오해와 탄압과 학살의 이야기였다.  '순이삼촌'은 그중 하루, 1949. 1. 16. 북촌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군인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된 '북촌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에 1948. 4. 3.은 좌익 무장세력이 경찰지서 등을 습격해 경찰과 우익인사들, 그 가족들을 살해한 날이었다.  그것이 민간인 대학살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제주 4.3사건으로 7년간, 제주도민 30만명 중 약 3만명이 살해되었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설민석 강사의 KBS TV 역사특강을 한번 볼 만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UMCw0ZgUYms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해방 이후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좌익세력이 제주도에 있었고, 이들이 실제로 경찰과 우익세력들, 그리고 제주도의 평범한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등의 일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무장 좌익세력을 진압하는 것이 미군정이나 남한 단독선거 이후 수립된 정부에게 필요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군정과 남한 정부 모두 무장 좌익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빨갱이'나 다름없는 제주도민 전체를 함께 불태워죽여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명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학살되었던 것이다.


  학살이라는 말로는 부족할까.  어린애의 다리를 붙잡고 바위에 내리쳐 머리를 부수어 죽이고,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굴에 수류탄을 던져넣고, 늙은이와 젊은 사람과 어린아이를 불문하고 밭으로 끌고가 총으로 쏴죽이고 대검으로 시체를 찔러 확인까지 하고, 그밖에 수도없는 증언들 속의 잔인한 사건들.  그것들 모두를 '학살'이라는 건조하고 확정적인 한 단어에 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밟고있는 이 땅에서 무고한 죽음이나 살을 찢는 고통스러운 죽음이 제주 4.3사건 이전에는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전쟁, 고문, 무고, 연좌......  수없는 살인들이 이 땅 위에서 자행되었다.  제주 4.3사건은 그런 수많은 사건에 비해 특별히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도, 특별히 더 잔인했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슬프고 몸서리쳐지는 기분을 느끼는 걸까.


  제주 4.3사건의 가장 큰 슬픔의 포인트는 학살 자체보다는, 학살자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막게 한, 인간의 평범한 편견과 광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 한 사람, 제주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학살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학살이었다.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땅에는 사람들이 남았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게 기쁘고 얼떨떨한,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으로 깊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약 300여명의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은 세월호 사건도 전국민에게 한동안 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주었는데 30여년에 걸친 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남긴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나라를 다시 잃으면 안된다는 공포가 가장 컸을 것이고, 악랄하게 수탈하고 탄압했던 일본의 잔재들, 친일 세력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도 있었을 것이다.  밀고를 경험하면서 사람에 대한 깊은 불신도 생겼을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남한 단독으로 할지 여부가 문제되었다.  남한의 단독선거에 찬성했던 쪽에서는 어영부영하다가 외부의 다른 세력에 의해 다시 주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을 수 있고, 반대했던 쪽에서는 어렵게 되찾은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게 될까봐 불안했을 수 있다.  어느쪽 입장이든 이해가 되는 상황이고,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나있었더라도 어느쪽을 지지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건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빼앗겼다 되찾은 국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당연히 고민할 수 있는 문제이고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당시 제주도는 친일경찰 등 친일세력이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이들은 미 군정의 비호 속에서 활개치고 있었다.  미 군정 관리들의 부패도 심각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나라도 미 군정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착취해서 부당하게 재산을 불린 부자들(당시 제주도민들의 입장에서는 성실하게 돈을 번 사람이 아니라, 친일행각의 대가로 혹은 부정부패를 저질러 시민들을 수탈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이런 부자로 보였을 것이다)의 재산을 다같이 나눠가지고 평등하게 살자는 식의 사회주의 사상에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기록은 제주도민의 90%가 좌파에 속했다고 하는데, 그 '좌파'라는 것은 지금 북한처럼 김일성 동무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비뚤어진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과 친일 내지는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 부자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3.1절 기념대회에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기마경찰은 아무런 사과나 조치 없이 다친 아이를 두고 가버렸다.  같은 날 미 군정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해서 민간인 6명이 죽었다.  사망자 중 한명은 아기를 업은 여성이었고 등에 총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전도민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 파업의 이유를 알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 군정 등은 이 파업이 제주도민들이 전부 좌익 세력이라 벌인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미 군정이나 우리나라 정부는 제주도민이 전부 소위 '빨갱이'인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격리하고 숙주까지 전부 제거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버렸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말로는 공산주의가 그렇게 무섭고 나라를 망치는 사상이라는데 이미 북쪽은 공산당이 점령했다고 하고, 남한이라도 빨리 정부를 세우고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제주도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였고 고립된 섬이라 사람들이 좀 성격이 이상한 것 같아.  그러니 저렇게 남한 단독선거도 반대하고 폭동을 일으키지.  제주도때문에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돼서 망할지도 몰라.  공산당때문에 일제보다 더한 암흑기가 올거야.  정말 무섭다.  그렇게 되기 전에 싹 쓸어버려야 돼.' 


  나라를 빼앗겨 우리 정부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독립운동가나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사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일제를 위해 전쟁에 동원되어 끌려나가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해방 후 공포와 분노, 불신과 편견 속에서 서로를 오해하고 적으로 돌렸다.  오해를 풀고 싶어하는 사람도,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포와 분노와 불신은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게 만들었다.  제주 4.3사건의 가해자(좌익, 우익을 막론하고)들은 단지 위에서 명령을 내린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 명령을 집행했던 사람들을 포함한다.  평범한 사람들, 그것도 해방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우리 민족끼리의 애틋함이 있었던 그 사람들이 무참한 학살에 가담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단순히 상부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각자 공포와 분노로 가득차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당시 제주 4.3사건에 관련되어있던 여러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극도의 공포와 분노 속에서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곡성'에서 사람들이 공포로 미쳐갔던 상황과 해방 후 우리나라의 상황이 비슷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제주 4.3사건은 아직 정확한 명칭도 없는 사건이고, 앞으로 규명하고 연구해나가야 할 문제이다.  올해 제주 4.3사건이 새롭게 조명받고 이런저런 전시회들이 열리는 것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역사학자들의 작업이겠지만, 제주 4.3사건은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가?  당신은 당신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대화해서 그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멀게는 아직도 정치에서 좌우의 대립이 심하고, 가깝게는 남들이 모두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 천원 더 비싼 볶음밥을 시키면 눈총을 받는 우리나라에서 저 질문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우스갯소리같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다름을 인정하는 문화,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대화로 좁혀가는 문화가 없다.     


  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오면서 한 가지 결심한 건 앞으로 어떤 사람이 내 기준에서 이해되지 않거나 비상식적으로 보이더라도 절대 그 사람이 '또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또라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참 편하고 간단하다.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문제있는 사람이고, 그러니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있는 사람을 제거해야 된다는 식으로 마음껏 분노하고 비난할 수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제주 4.3사건을 불러일으킨 건 바로 우리의 그런 평범한 생각이었다.        



  전시회장에서는 관람객들이 직접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명부를 보고 이름을 써서 추모하는 행사도 하고 있다.  희생자 명부는 옛날 전화번호부 책처럼 두꺼워서 넘기기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뒷쪽까지 보는 사람은 적을 것 같아서 뒤에서 이름을 골랐다.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김명미상, 이명미상, 이명미상, 이명미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이다.  이름을 모른다는건 일가족, 친척들까지 전부 몰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성이 같으면 가족이나 친척, 성이 다르면 어머니나 할머니, 숙모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할 뿐이다.  




  백지에 이름을 적는데 가슴이 뭉클해진다.  희생자들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바라면서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기도도 했다.  지금 이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가슴아파하는 이 마음으로, 내 삶도 아끼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간: 2018. 4. 29.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10:00 ~ 18:00

장소: 성북예술창작터, 성북예술가압장 (전시물이 각각 다릅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첫번째 골목에 성북예술가압장.

                    관람 후 다시 역쪽으로 와서 대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직진하다보면 왼쪽에 성북예술창작터.


 

매거진의 이전글 농업치료: 도시농부학교(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