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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pr 25. 2018

우울증 환자를 위한 실전 매뉴얼(6)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거나 없을 때 모두)


준비물: 수첩, 볼펜


응급상황에서 부를 수 있는
나만의 119 만들기 



  우울증 환자에게 위기는 매일 찾아온다.  업무상 큰일이 터지거나 시험에 떨어지거나 인간관계가 갑자기 틀어지는 등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평소 친했던 사람이 조금 무뚝뚝해지거나 안좋은 옛날 일이 갑자기 생각나는 등 별 일 없는 경우에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봄 날씨가 너무 좋은데 나 혼자만 외롭고 버림받은 것 같아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아무런 동기없이 갑자기 불안하거나 모든게 무섭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고, 지난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왕자를 떠올려야 한다. (응......?)


  

  '뜬금없이 웬 어린왕자?'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릴 때 읽었던 어린왕자 중에서 바오밥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어린왕자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양이 작은 나무들을 먹어치운다는게 정말이야?"
  "그래, 사실이지."
  "아,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어린왕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바오밥나무도 먹겠네?"

  사실, 어린왕자가 사는 별의 땅 속에는 무서운 바오밥나무의 씨들이 있었다.  나무 뿌리가 자라면 별 전체를 뚫고 들어갈 수도 있다.  바오밥나무들이 너무 많으면 조그만 별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매일 아침 세수하고 옷을 입어.  그런 다음 바오밥나무들을 찾아보는 거야.  바오밥나무는 어릴 때는 장미 덤불처럼 보여.  하지만 그 나무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바로 뽑아 버려야 해."

                                                                                                                           -어린왕자 중에서-  



우울증이라는 바오밥나무


   처음에는 아무리 작은 우울감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우울감은 우리의 내면에서 마치 바오밥나무처럼 깊고 굵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결국 그 우울감이 자라 우리 전체를 뚫고 들어가, 우리를 산산조각내게 된다.  큰 우울감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붙잡아 부숴버려야 한다.  


  우울증 환자의 마음은 우울증이라는 바오밥나무에게는 특급 지렁이분변토로 가득 채워진 아주 기름진 땅과 같다.  우울증 환자의 마음에 우울증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 우울증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성장해버린다.  우울증 환자가 가족하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 뒤에 바로 자살을 결심하고 울면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때문이다.  


  우리는 그 프로세스를 막아야 한다.  우울증 씨앗이 우리 마음에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씨앗들을 줍고 뽑아버려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잘 할 수 있으면 이미 우울증 환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그런 일에 대처할 수 있는 힘도, 의욕도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울증 씨앗이 자라나 숨통을 죄는 것을 손놓고 바라만 봐야 할까?


(양들아......  내 안의 바오밥나무 좀 먹어줘......)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런 응급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미리 정해놓고, 매뉴얼대로 대피훈련을 꾸준히 하는 방법밖에 없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아무리 심한 충격과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몸에 밴 행동과 생각은 기억이 난다.  그게 우리가 만들어야 할 '나만의 119'이다.


(넌 죽을 수 없어...... 죽으면 안돼...... 살아나! 내 돈 갚고 가라고.......!)


나를 지킬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수첩에 적어보고 미리 준비하기


  정신적인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각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해서 실천하면 된다.  응급상황에 바로 들을 수 있게 음악이나 동영상 파일을 스마트폰에 다운받아놓거나, 자살하고 싶을 때 바로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의 전화번호를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위젯으로 띄워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무조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모신 산소나 납골당을 방문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좋다. (이런 경우 산소나 납골당을 찾아가는 동안 머리를 식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 응급상황에서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들을 한번 적어보고 그중 가장 효과있어보이는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으면 된다.


  아래에서 제안하는 것들은 예시에 불과하다.  개인적으로 정해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인데 효과가 괜찮은 편이다.  실제로 바로 얼마 전에도 큰일(없던 우울증도 생길만한 강도의 사건)이 있었는데 아래의 방법들을 사용해서 잘 이겨냈다.       

  


  1. 기도문 외우기 (노래도 괜찮음)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반복해서 암송할 수 있는 기도문을 하나 외워놓는 것이 좋다.  갑작스럽게 큰일이 닥치고 온 몸과 마음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예전에 어떤 염세주의자가 자살하려고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라면을 먹다보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살을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최소한 라면은 끓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심한 우울증이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손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장소나 여건상 할 수 있는게 생각뿐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인도의 어떤 수행자는 평소에 그렇게 평온한 마음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하고 수련을 했는데, 정작 사고로 달리는 말의 안장에 발이 묶여 질질 끌려가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가르침이나 수행이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생각과 중얼거림이다.  그래서 기도문이나 노래를 암송하고 있는 것이 그런 순간에 큰 도움이 된다.


  종교가 있다면 자신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문이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고 외우기 쉬운 기도문을 암송하면 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런 기도문 중 하나를 선택해서 암송할 수 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 않아서 신자가 아니라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기를 보호해주는 어떤 절대자, 자연, 인생 그 자체, 아니면 실제 자기를 사랑해주는 부모를 생각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는 내용이라 큰 부담이 없다.  불교의 경우 옴마니반메훔같은 만트라들을 참고할만하다.  기도문이 싫다면 정말 힘든 순간에 위로가 되는 노래라도 좋다. 


  기도문이든 노래든 중요한 것은 암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매일 밤 자기 전에 연습하면 도움이 된다.  그리고 힘든 순간이 닥쳐오면 바로 그 기도문이나 노래를 반복해서 암송하기 시작해야 한다.  기도문이나 노래 가사에 집중하다보면 외부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나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과정이 잠시 차단된다.  마음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 기도문이나 노래 가사가 마치 생명을 구해줄 한 가닥 밧줄인 것처럼 매달려보자.  그러다보면 그 밧줄을 잡고 구덩이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다.


 

  2. '감정 목도리' 만들기



  뜨개질은 어느정도의 집중력과 손동작을 필요로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반복작업이다.  뜨개질 바늘과 실에 집중하면서 손을 움직이다보면 현재의 문제상황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다.  뜨개질의 가장 큰 장점은 휴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코바늘과 실 한 뭉치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우울한 감정이 밀려오거나 문제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꺼내서 뜨개질을 시작할 수 있다.   


  뜨개질을 하려면 일단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소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있기 때문에 코잡는 방법, 겉뜨기만 배워도 충분하다.  몇 코를 잡을지는 원하는 대로 결정하면 된다.  뜨개질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소품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단, 너무 복잡하거나 힘들 정도의 작품은 기획하지 말자.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에도 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야 한다.


  우울감이 밀려오면 바로 뜨개질을 시작하고, 가라앉으면 멈춘다.  우울감이 시작되면 조건반사적으로 바로 뜨개질 바늘을 잡도록 평소에 습관을 들인다.  그렇게 해나가다보면 목도리의 길이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그만큼의 면적이 내가 느낀 불안, 스트레스, 고통이다.  이렇게 '감정 목도리'를 만들다보면 내가 그 당시에 느꼈던 고통의 정도와 크기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데도 도움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까지 반응할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화가 많이 나고 힘들었구나, 이렇게 우울하고 고통스러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떤 일에 대한 나의 반응, 감정을 돌아볼 수 있다.


  '감정 목도리'는 한달 단위로 잘라내서 그 달에 어떤 힘든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적은 쪽지와 함께 상자에 보관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면 우리는 12개의 '감정 목도리'들을 갖게 될 것이다.  아마 유독 힘든 일이 많았던 달은 아주 긴 목도리가 있을 것이고, 즐거운 일로 가득했던 달은 손바닥만큼도 안 되는 작은 조각이 있을 것이다.  


  그 조각들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1년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칭찬해준다.  이렇게 힘든 시간들을 이겨냈구나, 이만큼 힘들었는데도 자살하지 않고 열심히 잘 버텼구나, 정말 대단해.  혹은, 그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만큼 힘들었구나,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신기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감정 목도리'들은 세상의 온갖 힘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 증거이다.

             


*뜨개질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동영상

코잡기: https://www.youtube.com/watch?v=NKTJuxOdbh0

겉뜨기: https://www.youtube.com/watch?v=zdsl9wZYRi0



  3. 무용, 헬스, 미술 등 매주 정기적으로 하는 취미생활 만들기



  중요한 것은 학원, 문화센터, 자치센터, 헬스장 등 매주 정기적으로 다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집에서 하는 취미생활보다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문화센터에 발레 수업을 들으러 간다, 매주 일요일에는 관악산으로 등산을 간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학원에 미술 수업을 들으러 간다 하는 식으로 정해진 공간에,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반복적으로 가는 취미생활이 훨씬 도움이 된다.  


  일단 정신적인 응급상황이 생기더라도 매주 다가오는 '취미생활 하러 가는 날'을 생각하며 순간적으로 기분을 풀 수 있다.  그리고 정말 기분이 다운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느낌이 들더라도 매주 다니는 취미생활 수업에는 습관적으로 혹은 돈이 아깝거나 그동안 들은 수업이 아깝거나 하는 등 반강제적인 이유에서 계속 참석하게 되는데, 그렇게 반강제적으로라도 다녀오고 나면 뭔가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과 만나서 긴장을 풀고 잠시나마 재미있게 대화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발레같은 무용의 경우에는 슈즈나 레오타드, 랩스커트 등 장비를 쇼핑하고 택배를 기다리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텅장주의)


  지금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월수금일 이런 식으로 하루걸러 취미생활 수업을 들으러 다니고 있다.  도시농부학교, 한국무용 수업, 업사이클 수업, 종교 수업, 등산.  현재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취미생활은 이 정도이다.  최근에 굉장히 힘든 일을 겪었는데, 공부나 일을 하는 일상만 있었다면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취미생활은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고 일정이 정해져있다보니 힘든 와중에도 그 날이 기다려지고, 참석도 하게 되었다.  일단 참석하니 기분이 많이 편안해졌고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문제는 다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취미생활이 든든한 기둥처럼 받쳐주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다보니 정신적인 응급상황을 잘 이겨내고 평온하고 즐거운 기분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밖에도 힘들 때 갈 식당, 카페등을 미리 정해놓는 것도 좋고, 힘든 날의 목욕을 위한 아로마 입욕제, 향초를 사두는 것도 좋다.  힘들 때는 아무 생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을 자겠다고 정했다면, 그런 특별한 날에 사용할 깨끗한 이불과 베개, 어릴 때 함께 자던 애착인형, 수면유도제 등을 미리 준비해두면 좋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반려동물을 받아들이고 책임지겠다는 마음의 준비, 어느정도의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반려동물을 키우면 자살을 생각하기도 어렵고(자식 두고 죽을 수 없는 부모의 심정과 비슷하다.  말 못하고 혼자 생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더할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가면 반려동물로부터 즉각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이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살리고 지킬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미리 준비해두면 위기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은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그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상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끝까지 버티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나온다는 것을.  우리의 생명에는 없는 출구라도 만들어서 빠져나갈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시간을 잘 견디기 위한 준비를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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